좋아하는 영화를 꼽으라면 늘 ‘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를 이야기했었다. BGM도 영상미도 최고였다. 비 오는 파리의 풍경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극찬을 받은 영화였다. 파리라는 매력적인 도시에서 시간여행을 통해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예술가들과 함께 '벨 에포크Belle Époque 시대'를 지낸다니, 이보다 더 매력적인 설정이 있을까? 수 십 명의 예술가들이 등장하고, 시간과 공간을 여행하는 설정에 ‘취향 저격’ 당하고, 예술가가 되고픈 주인공의 열정에 매료당했다. 그런 가운데 살아있는 유머들까지 더해져 살며시 웃음 짓게도 하는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평단과 대중의 평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감독의 개인사를 뒤늦게 알게 되고, 그의 작품을 더 이상 소비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비자인 나에게 그의 개인사는 선망했던 예술가에 대한 실망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고민이 시작되었다.
'작품과 작가의 사생활은 별개로 받아들여야 할까?', ‘어디까지 수용이 가능할까?’
작가의 사생활까지 점검하여 작품을 감상하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런 사람이 만든 작품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작품은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창작자의 소비자 기만행위를 그대로 묵인해선 안된다. 발표된 작품은 그의 생각과 삶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고, 사회와 상호작용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나는 많은 예술가들과 이별했다.
한국 작가로서 유일한 노벨상감이라 칭송받았으나 알고 보니 자아도취에 빠진 범죄자일 뿐인 시인과 그런 그를 여전히 추켜세워 돈벌이에만 혈안인 출판인들, 정권이 바뀌자마자 새로운 정권에 아부하는 칼럼을 써대는 작가, 대중의 칭송을 무기 삼아 주변인들을 학대의 대상으로 일삼은 배우 등이 그들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중에게서 얻은 권력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억압했다는 것이다.
“인간성이 별로지만 공부는 잘해.”, “그래도 그 사람 똑똑한 사람이에요.”
이런 말로써 기회를 준 우리 사회는 지금 혹독한 시련을 겪는 중이다. 지금이라도 그들을 하나 둘 마음속에서 지워나가고 철저히 외면하려 애써야 한다. 그래야만 다음 세대에게 떳떳해질 수 있다.
“텍스트는 결국 자기 자신이죠. 다른 텍스트를 선택할 때에도 나 라는 텍스트의 변주로서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_스무 해의 폴짝_신형철
"작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하는 건데, 사생활로 작품을 단죄하는 건 너무 가혹하네요. “
"그렇게 지워나가다 보면 내가 손해일 거 같아요. 너무 많아서이기도 하고 작품은 좋으니까요."
"숨겨진 비밀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유명해서 드러나는 것일 뿐인데"
결점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없다. 그 결점 또한 시대적 맥락과 사회 기준에 따라 변하기에 고정된 평가라는 것은 없다. 하지만 작가로서 기본을 지켜나간다는 것. 가식적이지 않고 솔직하다는 것, 잘못된 부분을 인정하고 수정해 나가는 자세는 작가의 의무다.
우리는 사회적 인간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발표된 작품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기 마련이고 그렇게 살아남은 작품은 사회의 기준을 만들어나가는데 일조하게 될 수밖에 없다.
만약 그것이 ‘작품은 훌륭한’ 상황이라면 우리 사회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느샌가 자극적인 것에 길들여졌다. 유행하는 ‘단짠단짠’이 최고의 맛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담백하고 깊은 맛을 원하는 독자도 분명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나는 어디에 서 있는지' 알고,
그렇게 생각을 수정해 나가는 자세야 말로 제대로 살고 제대로 쓰는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