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배우라면 요즘이 슬픈 영화를 잘 찍을 수 있는, 최고의 연기를 펼칠 수 있는 적기일 것이다.
모니터 앞에서 일을 하다가도, 잠을 자려고 침대 위에 누워 있다가도, 유리파편처럼 내 가슴에 다닥다닥 박혀 있는 2차 가해의 날카로운 몇 마디만 기억해 내면 금방 심장이 순두부처럼 물컹해지고, 두 눈은 온천수처럼 뜨끈하게 데워지며 눈물이 왈칵 쏟아지니까.
그렇지만 내가 2차 가해를 2차 가해라고 명명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왜 이름을 부르지 못하니~
믿고 따르던 나의 보스에게, 당신의 말은 2차 가해라고, 내가 당신의 2차 가해로 미쳐가고 있다고, 명확히 따지고 모 대학 연구소에서 책상을 싹 다 정리한 후, 지금껏 나는 몇달 째 소득 0원에 지출만 계속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 몸뚱이 하나만 남기고 다 버리겠다'라고 선언하며 책상을 정리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내 눈물은 후회의 눈물이 아니라 억울함과 분노의 눈물이다.
그런데...
그 모 대학 연구소의 다른 한 분, 내가 멋진 어른이라고 줄곳 생각해 오던 한 분마저 최근 내게 등을 돌리셨다. 이유는 모르겠다. 추측하건대, 아마도 내가 계속 항의하는 모습을 보고는 질리셨나 보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분이 나와의 연락을 끊어버리셔서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나를 "원래 이상한 애"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셨나 보다. 조직에서 배제된 이후로 감정이 격해지고 악에 받쳐가는 나를 보며 아마도 '쟤가 원래 감정이 격하고 거칠고 어리석구나'라고 생각하실지도. 그러니까 내 연락을 다 무시하시는 거겠지? 이렇게 또 한 명의 인연이 떠나갔다.
친하게 된 한 동료에게 내가 겪은 이야기를 쏟아내자, 그분이 말씀하셨다.
자신의 주변에도 그런 피해자가 있었다고.
성폭력 피해 이후에 주변에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했는데, 그게 잘 안되고, 오히려 더 많은 인맥을 가진 가해자는 평범하게 잘 살아가게 되니까 그 피해자가 너무 힘들어 했다고. 그런데 어느날 부터 그 피해자가 이상한 행동이나 말을 하기도 했다고.
"그런데요, 그게 어디 그 친구가 원래부터 이상한 사람이어서 그랬겠어요? 스트레스를 너무 받으니까.. 사람이 지쳐가는 거지... "
그런데 그때부터 주변에서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쟤가 원래 이상한 애였어"
이런 얘기가 돌게 되면, 가해자로 거론되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이해받게 되지 않을까? 운 없이 '이상한 애'한테 걸렸다고. 그렇게 되면 피해자는 그 조직에서 설 자리가 더 좁아지게 되겠지. 어쩌면 끝내 사라질지도. 그렇게 '가해자는 남고 피해자는 떠난다'는 명제가 다시 한번 증명되는 거겠지...
.....
한국OO학회의 같은 학회원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2차 가해를 당한 사람이 어찌 나 하나뿐이겠는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학회니 무수한 피해자들이 있겠지. 드러나지 않았을 뿐.
솔직히 내게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은 다짐한다. "몇 년 전에 ~~ 이런 여성이 있었어... 그런데 안타깝게 끝내 사라졌어..."라는 이야기의 주어로 회자되지는 않겠다고.
잠시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숨을 고를 수는 있다. 힘이 빠져 걷지 못하면 엎드려서 기어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짐해 본다."나한테 몇 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잖아~"라고 이야기하는 발화의 주체가 되겠다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당부할게요.
상처받는 거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 활동을 하다 보면, 내가 '상대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도 분명히 상처받는 일이 생길 거예요.
그리고 '우리 편'에게서 받는 상처가 훨씬 더 아플 수도 있어요.
많이 힘들겠지만,
그 상처로 인해서 도망가지 말고,
그것에 대해 꼭 주변 사람들과 용기를 내서 함께 터놓고 이야기하고
자신의 경험으로 간직하세요.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성찰하지 않아요.
하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자꾸 되새김질을 하고
자신이 왜 상처받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해야 하잖아요.
아프니까.
그래서 희망은 항상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요.
진짜예요."
「아픔이 길이 되려면」 by 김승섭 pp.304~305
"잊어라"
"뭐 그렇게까지 하냐"
"거기까지 했으면 이제 여기서 좀 만족해라"
...
지난번에 소개한 책, '허들을 넘는 여자들'의 유튜브 채널의 '최악의 망언(a.k.a. 2차 가해)' 에피소드에서 나온 이야기들입니다.
주제의 심각성과는 달리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만발한 수다 영상입니다. 공감이 필요하신 분들, 한 번씩 클릭해 보시면 같이 웃으실 수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