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던 사람, M의 이야기
고등학교 2학년. M은 나와 같이 놀던 무리의 친구는 아니었다. 어쩌다 대화를 해보면 나와 잘 맞는 것 같아서 친해지고 싶었지만 딱히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M과 나는 교실에서 가장 뒤에 놓인 책상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M은 수업시간에 공책에 이런저런 낙서를 했다. 거기엔 깨알같이 M의 마음이나 잡념들이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담겨 있었다. 나도 그 공책에 M을 따라서 내 머릿속 잡다한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그러다 며칠 전 보았던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름을 적었다. 집에서 공부하다가 지루하니 잠깐 시간이나 때울까 하고 자그마한 엠피쓰리 화면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듯 앉은자리에서 끝까지 봤던 유럽 영화였다. M은 내가 공책에 적어둔 그 이름을 보자 나에게 너도 '그' 영화를 보았느냐고 반가운 기색으로 내게 말했다.
내 기억 속엔 이 순간부터 우리는 친해졌다.
M을 볼 때마다 나는 물이 가득 담겨 있는 유리잔이 생각났다. 표면장력에 의해 겨우겨우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며 버티고 있는, 견디고 있는 느낌이었다. 물방울 하나만 똑 떨어지면 바로 넘쳐버릴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그 애에게 솔직히 말할 만큼 우리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M이 자퇴서를 내고 학교를 떠나던 날, 나는 교문 밖까지 나가서 그 애를 배웅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울었던 것 같다. M은 자퇴 후에 외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내게 국제우편을 종종 보냈다. 그 편지에도 그런 얘기가 있었다. 자기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울었느냐고.
그 애가 정확하게 무슨 연유로 자퇴를 하고 해외유학을 가게 되었는지, 사실은 몰랐다. M이 학교를 떠난 뒤에도 나는 한국에서 착실하게 수능 공부를 하는 수험생이었다. 몇 년 뒤, 내가 한국의 평범한 대학생이 되었을 때 M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어떻게 연락이 끊겼더라... 아마도 내가 무심했을 것이다. 대학교 초반의 나는 동아리 생활에 미쳐있었고, 그 외의 다른 관계를 돌보고 유지할 관심이나 에너지가 없었다. 그리고 동아리를 그만두며 도망치듯 지방에 내려갔고, 잠수를 타며 모든 연락처를 지웠다. 그때 M의 연락처도 사라졌었나.
내 인생 처음으로 써보았던 소설을 M에게 보여줬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소설을 M에게 보여주며 평을 부탁했다. M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덤덤히, 특유의 작고 오밀조밀한 글씨로 내 첫 소설 밑 빈칸에 감상문을 적어주었다.
슬프다고. 그런데 좋았다고.
우리는 같이 학교를 다니던 중에도 종종 서로 편지를 교환하곤 했다. 특별할 것 없는 고등학교에서의 일상이 편지로 기록되면 왠지 그 날은 특별했다.
M이 유학을 간 뒤로 어쩐지 더 자주 편지가 왔다. 심심하다며 할 일이 편지 쓰기 뿐이라나 뭐라나.
편지 내용 중에, 내가 그 애의 가족관계에 대한 얘기를 듣고 표정이 변했었단 얘기가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본 내용에 나야말로 '내가 그랬었나'하고 놀랐다.
나와 다른 것을 틀리다고 굳건히 믿고 있었던 고등학생 시절의 나. 그때 내 표정에 상처 받았을 M의 마음에, 뒤늦게 미안했다.
나는 너의 친구가 되고 싶었고,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너와 나누었던 편지가 즐거웠다, 늘.
빼곡히 적힌 너의 글씨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