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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 Sep 16. 2020

리바이스 청바지

내가 알던 사람, Z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

난생처음 교복을 입고, 교칙에 맞춰 머리카락을 자르고, 버스를 타고 등교했던 중학교는 나에게 새로운 세계였다. 초등학생 시절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종례 후 도서관에 가던 습관을 따라, 중학생이 되어서도 가장 먼저 학교 도서관의 위치부터 체크했다. 


아마 학기 초라 전산등록 같은 것이 미처 마무리되지 않아서, 대출은 바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부터 책 빌릴 수 있나요? 

그런 질문을 했을 나에게, 아마도 Z선생님이 설명해주셨겠지. 

다음 주쯤 오면 빌릴 수 있을 거야.


형형색색 알록달록 마치 놀이터 인척 현혹시키는 장식이 많았던 초등학교 도서관과는 달리, 중학교 도서관은 '나 도서관이야!' 외치듯, 공간의 모든 벽면이 책으로 가득했다. 그야말로 가득. 책장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책이 꽂혀있었다. 어릴 때 보았던 <미녀와 야수> 만화영화에서 볼 수 있는 야수의 서재 같았다. 그동안 본 적 없는 책이 잔뜩 있었고, 심지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책을 꺼낼 수 있는 커다란 책장들이 있었다. 


Z선생님은 지금 생각해보면 중학생들에게 좀 과하게 어렵다 싶을 만한 책들을 추천했었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라던가,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내 이름은 빨강> 이라던가. 

괜히 선생님과 말 한 번 더 섞어보고 싶어서, 선생님의 추천도서를 도서관에서 찾아 읽었다. 선생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누가 먼저 선생님의 추천도서를 다 읽을지 다른 애와 경쟁하듯 책을 보기도 했다.


선생님은 고양이와 함께 살았다. 저 멀리 이름도 잘 모르는 나라로 여행을 갔다가 고산병에 걸렸던 이야기를 자세하게 해주시기도 했다. 어깨에 닿지 않는 짧은 염색머리와 살짝 허스키한 목소리, 중성적인 이름을 갖고 있었다. 치마를 입은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패션이라곤 엄마가 사다 주는 새 옷이면 그저 만족하고 입던 내게, 친구가 말했다. 

"Z선생님은 맨날 리바이스 청바지만 입더라."


어느 날, 늘 그랬듯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 문 닫을 때까지 책을 읽다가 Z선생님과 같이 학교를 나왔다. 난 어떤 오기가 생겨서 선생님 집엘 놀러 가겠다고 졸랐다. 선생님의 고양이를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싶단 핑계를 댔던 것 같다. 난 별로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Z선생님은 단호하게 나를 막지 않고, 그저 내가 가본 적 없는 방향의 길로 계속 걸어가셨다. 나는 이것저것 종알종알 질문하면서 선생님 뒤를 졸졸졸 따라갔다. 어지간하면 떨어져 나가겠다 싶으셨는지 큰 언성 한 번 없이 이제 그만 돌아가란 말만 몇 번 하실 뿐이었다.


나는 횡단보도를 몇 번 건너고, 아파트 단지 두 개쯤 지나서, 우리 학교 근처 또 다른 중학교까지 지나가서, 기어이 지하철 입구까지 선생님을 쫓아갔다. 그곳에 도착해서야, 정말로 선생님 댁에 갈 수는 없겠구나 생각하고 멈췄다. 선생님은 그제야 한숨을 폭 내쉬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셨다. 

조심히 집에 가렴. 

그리고 조금씩 지하로 사라지는 선생님 모습을 뒤로한 채, 나는 다시 우리 학교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난처한 Z선생님 얼굴이, 몇 년이 지나서야 떠올랐다. 부끄러움과 함께. 

왜 그렇게 막무가내였을까, 나는?


그때 삼십 대 초반이셨던 선생님은 

지금도 도서관에 계실까? 

나를 기억하실까? 

언젠가 내가 쓴 책이, 선생님의 손에 들리게 될까? 


그렇다면,

선생님이 내가 쓴 책을 또 다른 십 대 소녀에게 추천해주실 날도 오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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