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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 Dec 16. 2020

다크서클

내가 알던 사람, R에 대한 기억

 햇살이 가득 교실 안에 들어오고 점심을 먹은 후의 수업이라 나른해질 무렵에, 영어 선생님은 칠판 가득 무언갈 적어두고 외치셨다.

"중학교 영어가 대학까지 간다. 이런 건 다 기본으로 알아야 하는 거야."

 교탁을 탕탕탕 두드리면서. 그러나 중학교에서 처음 영문법을 접하게 된 나로서는 투 부정사니 댓 용법이니 하는 온갖 문법 용어들, 심지어 명사, 동사, 형용사라는 문장 속 단어들의 이름조차 너무나 낯설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영어를 포기했다. 선생님께 찾아가 질문을 할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사실은 욕심도 없었다. 왜냐하면 영어를 못해도 충분히 내가 좋아하는 책들은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에만 빠져있기만 해도 괜찮았다. 어쩌면 동생들을 신경 쓰는데 바빠서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고 무관심했던 부모님 덕분이었을지 모른다. 이상하게도 그런 나를 R은 부러워했다. 질투를 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R은 내가 포기한 영어는 물론이고 다른 과목들, 특히 수학이나 과학 성적은 나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이었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이미 특목고를 목표로 공부하는 학생이었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도서관에 올 때면 매번 내가 이미 그곳에서 책을 읽고 있거나, 혹은 없었더라도 꼭 하루에 한 번은 꼬박꼬박 도서관에 방문해 책을 읽거나 대출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너는 그렇게 책이 재밌냐고 묻는 질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내가 읽고 있던 책들은 거의 대부분이 소설이었다. 재미없는 건 가차 없이 내려놓고 내 기준에 재밌는 책들을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R은 내가 읽는 책들이 뭔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어떤 이유 때문인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R의 눈 밑에는 늘 짙은 다크서클이 있었다. 아마도 학교가 끝나면 바로 학원에 가고, 그 후에 귀가를 해도 계속 공부를 하는 일정이 있었으리라.

 반에 짓궂은 남자애들은 밤늦게까지 대체 뭘 봤길래 얼굴이 그러냐며 R을 놀려댔다. R은 그런 거 아니라고 짜증을 내기는 했지만 힘이 센 편은 아니라 그런 장난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막을 방도는 딱히 없었다. 

 그러나 시험 기간을 지나 성적과 등수라는 결과가 나오면 R은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곤 했다. 반에서 1등을 했냐 못했냐 정도가 R의 성적에 대한 대화거리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얘기가 나올 때면 그의 다크서클은 놀림감이 아니라 노력을 증명하는 훈장이 되었다.


 몇 년 뒤, 그는 특목고에 진학했다. 그가 바라던 바로 '그 학교'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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