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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 Jan 22. 2021

바이올린

내가 알던 사람, L이야기

 사교적인 성향은 아니지만 낯은 별로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이었을까, 부모님은 큰 고민 없이 나를 시립 청소년 오케스트라에 보내셨다. 공식적으론 오디션을 봐야 입단할 수 있는 조건이 있었겠지만,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가 아빠와 아는 사이였는지 어쨌는지 별 일 없이 나는 시립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제1바이올린 자리에 들어갔다. 아마도 제일 끄트머리 자리였을 것이다.


 오케스트라 소속 학생들의 실력은 고만고만했다. 꽤 어릴 적부터 특기로 해오던 악기 연주를 좀 더 집중하여 전공으로 가져가야 할지, 혹은 꽤 오랫동안 전공 생활을 목표로 악기를 해왔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재능과 재력이 부족하여 그만둬야 할지 고민하는, 딱 그 정도의 실력이 모여있는 팀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별생각 없이 관성을 따라 악기를 배우고 연주했다. 일단 엄마 아빠가 '해오던 게 있으니 아깝지 않으냐, 일단 예고 입시까지는 봐보자'라고 했었고, 나는 그 말이 내 뜻과 동일하다고 여겼다. 그런 상황에서 오케스트라 활동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만나, 적나라한 서로의 스펙을 파악하는 장이었으니, 외부에서 자극을 받아 좀 더 개인 연습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을까 하는 부모님의 숨은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L은 오케스트라에서 만난 친구였다. 그와 나는 같은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매주 열심히 교회에서 반주 봉사를 한다는 것과, 같은 중학교를 다니고,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연주한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L은 내게 금방 마음을 열었다. 우리는 오케스트라 연습 중간 쉬는 시간에 짧게 수다를 떨고 간식을 나눠먹거나, 학교 복도에서 지나가다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가끔은 교과서나 체육복을 빌리러 서로의 반에 갈 정도의 관계가 되었다.


 L은 가정의 재정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건 꼭 L의 말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평소에 입고 다니는 사복이나 신고 다니는 신발, 들고 다니는 가방, 결정적으론 그가 사용하는 악기의 가격을 보면 알 수 있었다. 

 L의 악기는 앞으로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려는 사람의 소유물 치고는 너무 저렴했다. 사실은 내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으나 L은 그 사실에 대해 외면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곧 전문 악기 연주자의 꿈을 포기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우리가 속해있던 오케스트라 팀은 전용 연습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지역을 옮겨가며 연습을 했고, 난 가끔 아빠의 스케줄이 맞으면 아빠의 차를 타고 이동하곤 했지만, 거의 대부분은 혼자서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해야 했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우나 소중히 다뤄야 하는 내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서.


 어느 날은 정기연습이 끝나고 L과 나, 둘이서 집에 대중교통을 타고 집에 돌아가야 했다. 서로의 시답잖은 일상 얘기를 하다가 점점 말이 줄어들 무렵, L이 내게 말했다.

 "나 이제 바이올린 그만두게 됐어."

 그 이유는 그와 내가 모두 알고 있었던 바로 그 이유였다. 집에 돈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만큼의 재능이나 열정이, 혹은 그 밖의 다른 무언가가 L에겐 없었다.

 나는 이 상황이 놀랍지는 않았지만 안타까워하며 아쉬움을 표현했고, L은 그것을 나름의 위로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다음번 정기연습엔 L이 나오지 않았지만, 여전히 학교에서 마주치면 우리는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가끔 서로의 반에 가서 교과서나 체육복 따위를 빌리고 가볍게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1년 뒤, 나는 악기를 그만두었다. 난생처음 나가본 전국 콩쿠르에서 1등 없는 2등 상을 받은 뒤였다.

 심사위원이었던 어디 음대의 교수님이 적어서 흰 봉투에 담아준 심사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테크닉은 좋지만 음색과 음량이 아쉽다고. 나를 그 콩쿠르에 나가게 했던 레슨 선생님은 내 악기가 별로 좋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말했다.

 그제야 나는 L이 그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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