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던 사람, K에 대한 이야기.
K는 고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에 처음 만났다. 하여튼 처음 볼 때부터 눈에 띄는 멋진 아이였다. 우리가 좀 가까워졌다 느꼈던 것은 아마도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 애랑 단 둘이 마이클 잭슨의 <This is it>을 보러 갔던 기억이. 아니 사실은 걔가 새 학년 넘어가며 내게 주었던 쪽지에 적혀있어서. 그랬나 보다, 하고 기억한다.
내가 그 쪽지를 받은 이유는, 2학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내가 우리 반 아이들 모두에게 작은 간식 선물을 한 것에 대한 답장이었다. 40명 남짓 되는 같은 반 학우들 중에 내 선물에 답변을 한,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가 K였다.
K는 고등학생인 내가 보기에 정말 멋진 애였다. 밴드부 보컬을 했다. 노래도 잘하고, 교우관계도 원만하고, 왠지 연애도 잘할 것 같고, 공부도 잘했다.
그중에도 내가 가장 눈여겨봤던 것 중 하나는, 걔가 신은 머스타드 색 양말이었다.
누구나 신고 돌아다니는 삼선 슬리퍼 밑으로 비죽 나온 그 애의 발엔 가끔 진한 머스타드 색 양말이 신겨져 있었다. 엄마가 집에 사다 놓은 무채색 혹은 캐릭터 양말만 신고 다니던 내 눈엔 그게 어찌나 멋지게 보이던지.
그 애가 손글씨를 쓸 때, 모음의 세로선을 다른 글자들보다 살짝 더 길게 늘여 쓰던 것도, 쪽지에 실수를 해도 그냥 펜으로 그 위에 쭉쭉 선을 그어버리고 바로 다음 자리에 이어서 글을 쓰는 것도, 나는 그냥 다 멋있어 보였다.
내가 가지지 못했던, 어떤 응집력. 사람들을 이끄는 매력. 시쳇말로 말하자면 인싸력. 그건 아마도 그 애의 당당함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그 애는, 턱을 슬쩍 위로 들어 올리고, 눈은 살짝 내리깔고, 입술은 앞으로 쭈욱 내민, 그런 자신감이 담긴 표정으로 사진에 담길 줄 아는 아이였으니까.
나는 그때 막연하게 서울대 국문과를 가서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순진한 고등학생이었고, 그 애는 예술이 무엇이며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무엇인가'의 예비 지망생이었다. 그 쪽지에는 미래를 고민하며 방황하는 그 애가 담겨있었고, 걔는 나더러 확신이 있어서 좋겠다고 했었다. 지나고 보니 그 확신은 맹신이었음이 드러났지만.
나는 서울대는 아니지만 어쨌든 국문과로 진학할 수 있는 대학의 인문학부를 붙었고, 그 애는 국내 유명대학의 사진과에 붙었다. 대학에 간 후로도 가끔은 연락을 하고 페이스북으로 소식을 봤었는데. 어쩌다보니 페이스북을 지우고, 휴대폰 연락처가 날아가고, 하면서 연락이 끊겼다.
어쩌면 그냥, 그 이상으로 우리가 연락할 만한 이유는 딱히 없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 애나 나나 같이 노는 무리가 달랐으니.
어느 날, 집에서 영화 한 편을 가볍게 보고 싶어서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리모컨을 들었다. 좋아하는 영화배우가 나오는 짧은 영화가 있길래 그것을 골랐다. 영화를 보다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화면을 잠시 멈추고, 다시 몇 초 앞으로 돌렸다.
주인공이 편의점에 들러 간식을 사는데, 그 간식을 계산해주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그 사람이 바로 K였다. 얼굴을 절묘한 각도로 가려서 잘 보이지도 않고, 거의 손과 목소리만 등장하는 게 다였지만, 그래도 그 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휴대폰으로 네이버에 K의 이름을 검색했는데, 소속사에서 올린 보도자료, 진한 메이크업을 하고 찍은 컨셉 프로필 사진 같은 게 떴다.
진짜 배우 같다, 생각했다가. 배우가 맞지. 생각을 정정했다.
인스타그램에서 검색하니 K의 계정이 나왔다. 역시 사진학과여서 그런 건지, 아님 이제 정말 예술가라고 부를만한 직종의 종사자여서인지, 사진들이 멋졌다. 유명 연예인이 K의 사진 밑에 친근한 댓글을 달아준 것도 보였다.
그런 게 부럽기도, 아니기도, 다시 연락을 해볼까 싶다가도, 내가 좀 찌질하게 느껴지기도.
그러다가, 고등학생 시절 그 애와 같이 놀던 무리의 친구들과는 여전히 연락하고 만나는 기록을 보았다.
나도, 너에게 친구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궁금했다.
이제 내 옷장에는 내가 좋아하는 색의 양말로만 채워넣었다. 머스타드 색 양말은 3개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디핑크 색 양말을 신기도 하고, 쑥 색 양말도 샌들 위에 슬쩍 신고 외출을 하기도 한다. 나는 이제야 내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그때, K와 함께 영화를 볼 때의 나는, 그다지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해 절실하지 않았었는데. 그 후 10년이 지나서야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단 마음 때문에 속앓이를 시작했다. 지금, 배우로 살고 있는 너는 어떨까. 깊었던 고민과 방황이 끝나, 네가 원하던 예술가로의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