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새로운 개념과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낱말을 빚어냅니다. 이를 '조어력(造語力)'이라고 하는데 흔히, "중국글자말—곧 한자어—은 조어력이 좋다"고 합니다. 한자만 잘 알면 문해력도 높일 수 있다고 하죠.
그냥 눈앞에 보이는 아무 교육자료나 보도자료들만 봐도 한자어로 개념을 정리하거나 새롭게 만든 용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조어력만 가지고 말에 위아래를 가리는 건 아닐까요?
한자어는 낱말들을 합쳐서 뜻을 넓히거나 새로 만들기가 편합니다. 예컨대 '天(하늘 천)'이라는 글자에 '命(목숨 명), 理(이치 리), 性(성품 성)' 등을 붙이면 각각 '천명(天命), 천리(天理), 천성(天性)'이라는 말이 됩니다. 얼핏 보면 매우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언어 체계입니다.
그러나 말은 단지 효율만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자어는 소리 내어 말할 때 동음이의어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천리'가 '하늘의 이치'인지 '천 리의 거리'인지, 문맥이 없으면 알기 어렵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자어는 개념어로서 무게는 있지만 울림이 적고, 실제로 일상에서 쓰는 말과 멀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말이 아니므로, 나는 잘 알아서 쓴 한자어라도 상대는 전혀 못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말은 말소리 자체에 감각과 움직임이 담긴 언어입니다. '뛰다'라는 움직임 하나를 표현하는 데에도 '깡충깡충, 껑충껑충, 폴짝폴짝, 후다닥, ‘종종’ 같은 수많은 말이 있습니다. 이건 단순한 언어가 아닙니다. 몸을 움직이고 마음이 떨리는 것까지 말소리에 담아내는 예술입니다.
더욱이 우리말의 조어력은 오직 의태어나 의성어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다'와 같은 동사는 '공부하다, 설거지하다, 고백하다, 상상하다'처럼 여러 낱말 뒤에 붙어 수많은 말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말도 충분히 논리적이고 창의적인 조어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말의 권위가 너무 높아졌습니다. 논문, 공공 문서, 보고서 들에서 '접하다, 기능하다, 육성하다, 독자적, 집약적' 같은 한자어는 읽는 사람을 버겁게 만듭니다. ‘만나다, 하다, 키우다, 혼자, 한 데 모은’처럼 일상에서 주고받는 우리말을 두고, 글을 쓸 때는 꼭 어려운 한자말을 씁니다. 그게 전문가, 배운 사람들의 글이라는 그릇된 생각이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전문성은 복잡함이 아니라 명료함에서 비롯됩니다. 나와 말을 나누는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단박에 알 수 있도록 쓰는 글, 그게 바로 잘 쓴 글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배운 사람’의 말은 어려워야 한다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시대입니다. 모두가 글을 쓰고, 모두가 소통하는 이 시대에는 누구나 알아먹을 수 있는 말에 깊이를 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언어는 권력에서 벗어나, 우리의 마음을 잇는 도구가 됩니다.
우리말은 단지 ‘쉬운 언어’가 아닙니다. 우리말에는 몸짓이 있고 풍경이 있고,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쓰는 말이 바로 우리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