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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호 Oct 17. 2022

정빈의 모습 #1

수직과 수평의 바다

  도시는 수많은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길은 효율성을 위해 일정한 방향으로 흐른다. 수많은 큐브가 교차하는 거대한 시스템은 오직 자본의 능률을 위해 설계되어 점차 진화하고 있다. 이곳의 표면은 파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바다의 만조와 간조처럼 공간을 채우고 비우는 시간이 반복된다. 이 수직과 수평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아담한 공간이 있다. 바로 정빈의 작업실이다. 


  주말이기 때문인지 주변은 한산하다. 사무공간으로 활용되는 일정한 면적의 건물들이 가득 모여있다. 업무단지로 조성된 곳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다. 이러한 공간에서는 많은 이들의 동선이 일정한 패턴을 만들게 된다. 이른 아침 출근을 위해 지하철에서 나오는 시간, 정오의 점심을 위해 건물 밖 식당으로 이동하는 시간, 그리고 집을 향해 가는 저녁 시간 등 사람들은 분절된 시간의 늪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정빈이 작업실을 이용하는 시간은 이들과는 다른 형태를 보인다. 비교적 한적한 주말, 그리고 모두가 퇴근을 준비하는 시점부터 이 작업실은 비로소 활발하게 움직이게 된다. 예술가들이 모여있는 지역이나 레지던시와 같은 공간에서는 대부분 자유롭게 시간을 활용하기 때문에 정빈과 같이 일과시간 외의 공간활용은 매우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정빈의 시간은 보편의 반대를 향하고 있다. 



  인공의 빛이 어둠을 밝히는 모눈의 지평 어느 곳에 홀로 남아 색과 구조의 틈을 열렬히 만들어내고 있었을 것이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고요하고 적막한 그곳에서 자신의 방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빠르고도 느린 속도로 캔버스의 표면을 스치고, 누르고, 달래며 처음과 마지막의 경계가 흐려지는 장면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가 만든 세계는 지금 그림자조차 날카롭고 뾰족한 모눈의 지평 위에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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