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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이가기전에 Mar 10. 2022

내 생의 중력

우리 사랑의 결실

만삭의 임산부가 된 요즘 나는 깊게 잠들지 못한다. 이른 새벽이면 훌쩍 큰 태아가 방광을 눌러 소변이 마려워 잠에서 깬다.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잠을 청해보지만 달아나 버린 잠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다.     


눈을 감은 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눈치 없는 아침 햇살이 침대로 스며든다. 옆자리에 누운 남편이 부스스 눈을 뜨고 잠을 못 잤냐며 머리를 쓰다듬고 가볍게 입을 맞춰준다.     


그럼 나는 잘 잤노라고 남편을 안심시킬 답을 하고는 눈 감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속눈썹 개수를 센다. 다 셀 즘엔 알람이 울리고 남편은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다녀오겠노라고. 오늘도 배 속의 아이와 잘 지내고 있으라고. 점심은 어제 저녁에 끓여둔 국이랑 냉장고에 있는 반찬들을 꺼내 먹으라며 몇 번이고 반복해 말을 하고 나서야 남편은 비로소 집을 나선다.     


이제 막 출산 휴가를 맞은 나는 남편의 출근을 배웅해준 뒤 간단히 요가를 하고, 아침을 챙겨 먹는다. 기사나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 심드렁히 낮잠을 자고 일어나 남편이 간밤에 끓여둔 국과 엄마가 보내준 반찬에 밥을 한 숟갈 먹는다.


출산 전 마지막 여유를 즐기며 들이닥칠 진통을 기다리는 것이 요즘 나의 유일한 과제다.




결혼은 남편이 장담한 것처럼 내 삶을 퇴보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어 원하던 부서로 이동을 했고, 남편과 양가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직장을 다니며 대학원도 졸업할 수 있었다.


남편은 큰 소리를 쳤던 것처럼 우리 오빠에게 좋은 형이 되어주었고, 가끔 함께 소풍을 가 손을 잡고 나란히 걷고는 한다.


엄마와 아빠는 부쩍 사이가 좋아졌다. 우리 부부를 보며 서로를 더 사랑하지 못했음을 반성하며 지금이라도 행복하게 지내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마파두부 먹을까? 아님 두부전골 먹을까?”     


요리를 좋아하는 남편은 어느덧 우리집의 5년 차 메인 셰프가 되었고, 그의 가장 큰 고민은 오늘 저녁 메뉴를 선정하는 일이다.     


아, 우리는 3년간의 주말 커플, 또 3년간의 주말 부부, 그러니까 총 6년 동안의 주말 오작교 생활을 재작년 청산했다. 이 또한 남편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 인생의 대척점에 놓여있던 ‘평화’와 ‘화목’이란 단어는 이제 내 일상을 가장 잘 묘사할 수 있는 말이 되었다. 남편은 몬테비데오 해상을 떠돌던 부표였던 나를 끌어당겨 지각과 맨틀, 뜨거운 외핵과 내핵을 통과시켜 우리의 작은 아파트에 내려놓았다.


언젠가 남편이 선물해준 시집의 제목처럼 ‘내 생의 중력’은 남편을 향해 있어 우리가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서로를 끌어당기다가 거스를 수 없는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된 것은 아닐까?




어렸을 적 가장 부러웠던 친구는 돈 많은 부모를 둔 친구도, 예쁜 친구도 아닌 사이 좋은 부모님을 둔 친구였다. 그 친구의 부모님이 손을 맞잡고 학예회에 온 걸 보고 있으면 가슴 어딘가가 아플 정도로 부러웠다. 우리 부모님도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하며 살면 좋겠는데, 아니 적어도 나는 그런 부모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왠지 그럴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슬펐다.     




아가야, 엄마랑 아빠는 너에게 물려줄 큰 집이나 건물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한평생 너를 부양해줄 수 있을 만큼의 넉넉한 돈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빠가 매주 복권을 사고는 있지만 당첨될 가능성도 희박하고 (아빤 곧 될거라고 말하지만), 엄청난 성공 가도에 오를만한 사업 아이템을 가지고 있지도 않아.     


그래도 한가지 자부하건대, 엄마와 아빠는 서로를 세상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하며, 그 사랑을 기초로 너를 낳았다. 너를 기르면서도 우리는 그 어떤 액수의 돈과도 맞바꿀 수 없는 사랑을 실천하고 보여줄 수 있는 자신이 있단다. 그 사랑은 위대하기보다는 아주 소소하고 일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을 거야.     


너의 수저는 금수저나 은수저처럼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세월이 흘러도 부러지거나 빛바래지 않을 튼튼한 수저이기에 네가 스스로 밥을 먹어야 하는 날이 오면, 먼 훗날 그 수저로 너의 아이에게 반찬을 올려주어야 하는 날이 오면,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네가 이 글을 활자 그대로가 아니라 읽고 이해할 무렵이 되면, 우리는 어느새 중년이 되어 있겠구나. 그 시공간에서 우리 부부는 아직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니? 만약 그렇다면 너는 이미 아빠를 존경하며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나고 있겠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너는 엄마 아빠의 깊은 사랑의 결실이라는 사실만은 꼭 알아주렴. 네가 스스로의 탄생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도록.


그리고 이 글을 가지고 내게 와 아빠가 엄마에게 얼마나 고마운 사람이었는지 얘기해줄래? 아빠가 엄마랑 결혼하고 싶어서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도 동네방네 소문내서 평생 놀려주라.


혹시 아니? 다락방 깊숙이 숨겨두었던 먼지 쌓인 지난날의 우리 사랑이 다시 꽃처럼 피어날지도.


참, 오늘 저녁은 마파두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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