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된 엄마 아빠
선배와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지 않아 나는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탓에 휴학은 꿈도 못 꿔봤고 그저 빨리 아르바이트나 과외 생활을 청산하고 제대로 돈을 벌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들은 많았지만 돈 없이는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학점, 영어 성적, 제2외국어, 교환학생 경험에 당찬 성격까지, 나는 스스로를 대기업에 최적화된 인재라고 생각했었다. 때문에 번번이 받는 불합격 문자가 혼란스러웠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부정당하는 것 같아 서러웠다.
삼십 군데의 기업에 지원했고, 그 중 세 군데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나에 대한 기대치가 에베레스트 저리가라인 부모님한테는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있다는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면접용 정장을 사겠다고 용돈을 달란 말도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장 사러 가자. 면접 봐야지”
그 선배, 그러니까 나의 남편, 그러니까 당시 나의 남자친구는 나를 아울렛에 데려가더니 멋진 정장을 한 벌 사줬다.
“너무 예뻐서 합격하겠다.”
지금 돌이켜보면 취업 준비 시절이 뭐 그리 힘들었을까 싶지만, 당시 그 시절은 지옥의 다른 이름이었다. 대학 마지막 학기를 학점을 꽉 채워 들으면서 밤새 자기소개서를 썼고,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합격 문자들은 창고의 쥐새끼마냥 자존심이고 자존감이고 가리지 않고 갉아먹었다.
그 힘든 시절 나를 지켜준 것은 남자친구였다. 세 네 군데에서 같은 날 불합격 문자를 받은 날이면 그 먼 곳에서 잠깐 얼굴을 보겠다고 일을 마치고 세 시간을 달려 서울에 왔다. 몇 시간 남짓 무너진 내 멘탈을 달래주고는 출근을 하러 다시 세 시간을 달려 전주에 갔다.
그나마 서류에 합격한 세 군데 중에 두 군데는 면접에서 떨어졌고, 마지막 남은 한 군데의 최종 면접을 앞둔 날, 남자친구는 느닷없이 명품 스카프를 들고 나타났다. 선물 포장 안에 작은 엽서가 있었는데 그 때 적힌 그 글을 떠올리면서 나는 아직도 눈시울을 붉히고는 한다.
‘너는 무조건 잘될 거야. 돈 벌기 시작하면 이런 것들을 아주 쉽게 살 수 있을 정도로. 그래서 내가 미리 선수 칠게. 너의 첫 명품은 내가 선물하고 싶었어’
그의 무조건적인 믿음 때문이었을까? 나는 가장 가고 싶었던 마지막 남은 한 군데의 최종 면접에 합격했다. 부모님, 선후배, 동기들 할 것 없이 대학을 칼졸업한 스물셋의 나이로 굴지의 대기업에 한 방에 합격했다고 멋지다며 나를 치켜세웠지만, 그 준비 기간 동안 나는 한순간도 멋지지 않았다. 멋진 사람은 그였다.
어린시절의 아픔을 보듬어주던 선배가 남자친구가 되어 가장 힘든 시절 버팀목이 되었고, 우리는 그렇게 별 탈 없이 행복한 연애를 지속했다. 연애한 지 3년이 흘렀을 무렵, 나는 회사 근처로 이사를 했고, 남자친구와 짐 정리를 마친 후 짬뽕에 소주를 한잔 기울였다.
“다음에 이사 갈 곳은 우리 신혼집이겠지?”
“무슨 소리야. 나 결혼 안 한다니까? 이제 한창 일하고 있는데 결혼해서 애기 낳으면 나 일은 어떻게 하라고. 나는 일이 더 좋아”
정말이었다. 빨리 취업해서 돈을 벌고서는 그만두고 대학원을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간 회사였는데 어떻게 된건지 일이 너무 재밌었다. 실력을 인정받는 것도 즐거웠고, 사람들과 부닥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적성에 맞았다.
“왜…. 왜 결혼을 하면 일을 할 수가 없는 건데….”
남자친구가 울고 있었다. 그것도 짬뽕을 입 주변에 잔뜩 묻히고는 펑펑. 그렇게 우는 모습은 처음 보아서 나는 할 말을 잃고 연신 휴지만 건네주었다.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와 헤어지거나 결혼을 하거나 둘 중 하나의 결정을 빨리 내려주는 것이 그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래 오빠. 결혼하자”
도저히 헤어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인생에는 없을 것이라 믿어왔던 결혼이란 단어를 처음으로 입에 올렸다. 우리는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이렇게 울어서 그 말을 실현할 줄이야.
결혼을 하자고는 했지만, 나는 사실 결혼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남자친구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하며 반지를 건네고 있었다. 반지를 손에 끼워주더니 우리 부모님을 뵈러 가자고 했다.
“정말 나랑 결혼하는 거 후회하지 않겠어? 왜 굳이 스스로 장애인의 가족이 되겠다는 거야? 나야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오빠는 선택할 수 있잖아. 생각보다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니까”
“내가 언제 쉽게 결정했대? 많이 생각했고, 가볍게 생각하지도 않아. 너와 함께하면 그 어떤 길이든 재밌게 걸을 수 있을 것 같거든. 너야말로 그 짐을 왜 혼자 짊어지려고 해? 우리는 잘할 수 있을 거야. 언제나처럼"
이 사람은 또 호언장담을 했다.
"엄마한테도 연애 초반에 이미 오빠 얘기 다 해놨어.”
심장이 쿵하고 바닥을 쳤다. 나를 사랑하는 남자야 콩깍지 때문이라도 이를 감당하겠다고 하겠지만, 그의 부모는 다를 것이 분명했다. 부족함 없는 아들이 굳이 가시밭길을 걷겠다고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 테고, 손주를 생각하면서 유전을 걱정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라시는대?”
“자기를 어떻게 보는 거냐고 화내시던데”
“그게 무슨 말이야?”
화내셨다는 말에 불안감이 커졌다.
“자기가 그런 것 때문에 반대를 할 정도의 사람으로 보이냐고 그러시더라고. 사실 몇 년 동안 지적 장애아 가정에서 돌봄 봉사활동을 하고 계셨대. 나도 이건 몰랐어.”
상견례를 앞두고 남자친구의 엄마를 뵈었다. 남자친구의 고향이 제주도라서 비행기를 타고 만나러 갔었다. 남자친구와 그의 엄마, 나 셋이서 눈 내린 숲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숲길의 끝에 다다를 때쯤 남자친구가 화장실에 갔고, 엄마와 나만 하얀 눈길 위에 남았다.
“어머님, 저 들었어요. 지적 장애아 돌봄 봉사활동도 하신다고...”
한 사람이 아니라 어떤 가족에게 오빠에 대한 생각을 묻는 것이 처음이라서 나는 어떻게 말을 꺼낼지 모를 정도로 많이 긴장했다.
“응. 그 아이 참 순수하고 천사 같아. 내가 오히려 봉사를 하고 오면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다니까. 오빠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어.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올곧고 당당하게 자란 네가 참 대견하구나”
사실 남자친구와 결혼을 진정으로 결심한 순간은 이때였다. 나의 가장 큰 아픔을 미소로 안아준 남자와 그의 엄마. 그들과 남은 생을 함께하면서 염치없지만 내 어깨를 짓누르는 이 짐을 같이 들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버진로드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