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의 첫 만남
“OO씨,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파랗습니다. 오늘따라 당신이 그립….”
“너 정말 그만하지 못하겠니?”
동생은 가끔 엄마를 놀려먹기 위해 엄마가 결혼 전 아빠에게 썼던 연애편지의 도입부를 읊는다. 평소 뭐든 부끄러워하는 것이 없는 엄마도 자신의 30년 넘게 묵은 연애편지 앞에서는 얼굴이 붉어진다.
“너희 아빠는 이걸 왜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 거야. 버려버려 제발!”
아빠가 멀리서 조용히 웃는다. 주말 아침의 이 모습을 상상하면 우리집은 퍽 평화롭고 화목해 보이지만, 사실 내가 자란 가정에서 ‘평화’와 ‘화목’은 지구의 정 반대편인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남동 해상만큼이나 먼 단어였다.
우리 오빠는 장애가 있다. 신체적 장애가 아닌 지적 장애이기 때문에 엄마는 오빠를 품고 있는 동안, 아니 오빠를 낳고 돌이 될 무렵까지는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빠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어찌나 예쁜지 엄마는 오빠를 처음 낳고 세상에 이렇게 예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고 했다.
“너무 예쁘게 낳느라 내가 머리를 잘 만들지 못했나 봐. 외모 신경 좀 덜 쓰고 머릿속을 좀 더 신경 쓸걸!”
지금도 미남인 오빠를 바라보면서 엄마는 가끔 자책 섞인 한탄을 하고는 한다. 아빠는 오빠가 어렸을 때 엄마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 짧지 않은 방황을 했고 엄마를 되려 더 슬프고 좌절케 했더랬다.
아빠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두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아빠는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술을 먹고 들어와 엄마와 싸우고는 했고, 엄마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강하게 저항하며 욕을 했다. 오빠는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아빠 사이를 백색 소음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며 빙빙 돌았다.
그럼 나는 동생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가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아직 어린 동생이 내 품으로 파고들면 베개를 내려놓고 동생 귀를 막아줬다.
“다 지나갈 거야. 내일 아침이면 괜찮을 거야”
다음 날이 되면 아빠는 없었고, 엄마는 여기저기 멍이 든 몸으로 아침 식탁을 차렸다. 부엌 한편에서 엄마는 울었고, 나는 메인 목으로 조용히 밥알을 넘기느라 몸을 떨었다.
허구한 날이면 서로를 잡아먹을듯 때리고 으르렁대는 이 남자와 여자에게 연애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동생이 발견한 편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영영 깨닫지 못했을 거다.
이렇게나 서로를 싫어하는 두 사람이 결혼해 세 명의 아이를 낳은 것에 대해 나는 큰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편지가 답을 주고 있었다. 사실 둘이 결혼해서 우리를 낳은 것은 사랑했기 때문이었다는 답을.
2011년 서울의 내로라하는 대학에 입학해 강원도로 오리엔테이션을 갔다. 말이 오리엔테이션이지 밤에는 동기, 선배들과 술을 푸지게 마시고, 낮에는 숙취로 해롱대다가 다시 밤이 되면 회복한 위장에 술을 붓는 원정 술파티 같은 것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 원정 술파티가 퍽 재밌기는 했지만, 살짝 실망을 했더랬다. ‘대학 선배’라고 함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울림을 주고, 내가 모르는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늘어 놓는 인격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성숙한 사람들일 줄 알았는데 그냥 내 또래의 세상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리엔테이션의 마지막 날, 고학번 선배들이라며 여러 명의 남자들이 양주를 들고 도착했다. 자기들끼리 웃으며 술판을 벌이다가 내 옆자리에 한 선배가 앉았는데, 술을 아주 잘 먹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근데 이상한 점이 웃긴 와중에도 그 선배의 말에는 무게가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따뜻함도 함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 개학을 앞둔 날, 나는 그 선배를 생각하며 꼭 친해지고 말겠다고 다짐을 했더랬다.
“내 선배는 너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