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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이가기전에 Mar 09. 2022

연인이 되기까지

연인이 된 엄마 아빠

대학교 신입생 1년 동안 나는 그 선배를 죽어라 쫓아다녔다. 선배가 있는 술자리는 모조리 참석했고, 시험공부도 꼭 선배의 옆자리에서 했다. 점심시간이나 공강이면 선배한테 연락해 조금이라도 수다를 떨었다.

    

대화의 깊이가 다른 사람이었다. 그 사람 앞에서는 숨기기 급급했던 어릴 적 상처도 드러낼 수 있었고, 모르는 수업 내용도 물으면 답이 단번에 나왔다. 그해 나의 생일에는 사물함에 기형도의 시집 한 권이 놓여있었다. 생일에 시집을 선물하는 사람은 그 선배 뿐이었다.


“이제 나 졸업인데 네 동기들하고 좀 놀아”


졸업을 앞둔 고학번과 그의 친구들하고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은 1년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선배는 그렇게 딱 두 학기를 같이 놀아주고는 취직을 했고, 전주로 떠났다. 선배의 졸업식 전날 나는 1차에서부터 울기 시작해서 2차, 3차까지 가열하게 울고는 기숙사 방에서 잠이 들 때까지 울어 재꼈다.


다음날 선배의 졸업식에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나타나서 선배와 가족들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 친구가 네 여자친구냐?”     


“아니야. 얘는 그냥 내 후배”


그때만 해도 선배는 여자친구가 있었고, 나도 선배를 존경하고 따를 뿐 남자로서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를 여기던 때가 있었다.




선배가 졸업하고 나자 드디어 내게는 빈 시간들이 생겼고, 그 시간들을 다른 남자들이 채웠다.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나는 인기가 퍽 많았다. 예쁘장한 외모도 한몫했겠지만,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성격에 매력을 느끼는 남자들이 꽤나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성격의 여자를 보듬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자존감이 높아야 하기에 나를 좋아해주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아량이 넓고, 사랑을 재지 않는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에게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다.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내 모습은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이 시대의 신여성 상이었겠으나, 실상 나의 속 깊은 곳은 상처로 가득한 어린애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내게 실망하고 떠날까봐 두려워 나는 내 아프고 슬픈 이야기를 터놓지 못했다.


훗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오빠를 보살피는 것은 나의 몫이 될 터였다. 이를 함께 해줄 동반자를 찾는 것은 힘들 것 같기도 했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리 오빠를 사랑하고, 응당 그래야 마땅하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에게 이를 함께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폭력적이지 않은가?


그 요구를 받은 후의 그들의 거절도 두려웠다. 사랑하는 가족 때문에 사랑하는 이에게 거부당하는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연인들에게 투명하고 무한한 마음의 벽을 쌓아놓고 무심하게 돌아서 버리고는 했다.


그렇게 몇 사람의 인연을 떠나보내고 나는 영영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나의 전부를 보듬어줄 수 없고, 그럴 수 없다면 결혼은 하지 않고 연애만 주구장창 하다가 삶을 마감하겠노라고. 그 삶도 참 멋진 삶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몇 해가 흐르고 또 한 번의 이별을 한 나는 문득 선배 생각이 났다. 선배가 그리웠다기보다는 당시 한창 전주 한옥마을 여행이 유행이었고, 선배가 전주에서 일한다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어. 아직 전주에 있지. 내려와 여행시켜줄게”


그렇게 내려간 전주에서 우리는 예전처럼 술을 퍼마셨고, 몇 해간 쌓아둔 이야기를 하느라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여행의 마지막 날, 서로 말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었다. 우리가 선후배 관계를 청산하고 좋은 연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전주 어딘가에서

여행이 끝나고 선배는 매일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매일 올라온 이유는 내가 매일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결혼 생각이 없는 내가 선배와 연인이 되었을 때 결말은 뻔했다. 헤어짐뿐이었다. 나는 인생에서 허망하게 소중한 인연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 우리는 헤어지지 않을 거야. 내가 장담할게. 나를 믿어”     


선배는 복안이라도 있는 것처럼 굴었다. 우리는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내가 그를 잃을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그 확신에 찬 모습에 나는 그만 그를 받아주기로 했다.


“에라 모르겠다. 그래 그까짓 거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그래 만나보자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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