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의 라떼? 오늘의 커피!

by Minimum

필자는 스타벅스 코리아의 론칭과 함께 사회인으로서의 첫 발걸음을 떼었다. 대학 시절 내내 취업에 대한 걱정도 대단한 준비도 딱히 하지 않았다. 일자리가 넘쳐나 원하는 기업을 골라 입사할 수 있던 호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IMF 사태가 터졌고 안이하고 수동적으로 취업 준비와 구직활동을 하던 나는 뒤통수를 맞은 듯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줄줄이 면접이 진행 중이던 상황이었다. 최종 면접까지 갔기에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던 몇몇 회사에서 불합격 통지가 날아들었다. 사면초가가 따로 없었다. 쌩쌩 도망치듯 출발해버리는 취업열차 중 막차를 가까스로 집어 타긴 했지만 요즘의 청춘들처럼 학창 시절 내내 스펙을 쌓아 놓지도 못했고 사회인으로서의 최소한의 태도와 마음가짐도 준비되어있지 않은 채 회사원이 된 나에게 신입 시절은 좌절과 고통이 연속이었다. OS 프로그램도 능숙하게 다루지 못했고 문서 작성 능력도 엉망이었고 언변도 어눌했으며 무엇보다 공과 사를 구별하는 태도와 자세를 갖추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 나의 모습이 마땅치 않았던 상사에게 늘 혼나기 일쑤였고 과연 내가 앞으로 직장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지 깊은 고민과 우울에 빠졌다.

그 어둠의 시절, 단비처럼 나를 위로해 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회사 앞에 막 오픈한 스타벅스에서 점심 식사 후에 마시던 달콤하고 진한 바닐라 라때 한 잔이었다.



저지방 우우 말고 일반 우유에 에스프레소 3샷, 바닐라 시럽 4 펌프가 들어가는 그란데 사이즈의 아이스 바닐라 라떼. 점심을 먹고 나면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사무실로 다시 들어가야 했지만 여유롭고 포근한 그 공간에 잠시 앉아 마시는 나만의 옵션의 바닐라 라떼 한 잔은 닭고기 수프보다 내 영혼을 치유하고 어루만져 주었다.


그래, 이 진한 카페인과 달콤함을 무기 삼아 다시 전장으로 나가야지...

라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그렇게 학창 시절 내내 즐겨 마시던 마알간 헤이즐넛이나 블루마운틴 원두커피를 잊고 진한 에스프레소의 맛에 빠지게 되었다.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훌쩍 어디론가 도망쳐버리고 싶었던 철없던 신입사원은 그렇게 작고 사소한 위로에 기대어 조금씩 성장해갔으리라. 이 따위로 일할 거면 지금 당장 그만두라고 독설을 퍼붓던 그 상사는 몇 년 뒤 둘도 없는 멘토가 되어 술 한잔 기울이며 업무와 커리어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선배가 되었으니까...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바닐라 라떼 말고도, 아이스 모카, 캐러멜 마키아토, 자바칩 프라푸치노, 화이트 초콜릿 모카, 돌체 라떼 등 나의 최애 메뉴는 계속 바뀌어갔다. 스타벅스는 재료 배합 레시피가 워낙 탁월하기에 왠지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는 왠지 잘 주문하지 않게 되었다.

그로부터 수년의 세월이 흘러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경단녀 전업주부가 되었다. 스타벅스에서 딸아이를 기다리던 어느 날 문득 '오늘의 커피 “과테말라 안티구아'라는 칠판에 쓰여진 손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내친김에 주문을 했다.


카운터 너머로 직원이 브루 머신에서 갓 내린 커피가 담긴 유리 주전자를 들어 커피를 부어 내어 준다. 별생각 없이 노트북을 펼치고 테이블에 앉아 마시기 시작했다. 싸늘해진 가을 날씨에 몸을 녹여주는 따스함과 무엇보다 작업을 하며 수시로 마시면 마실 수록 우유와 시럽이 들어가지 않아 텁텁함 1도 없이 깨끗하고 깊은 풍미를 선사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의 커피는 에스프레소가 아닌 Brewed Coffe 즉 커피메이커에 내린 우리가 90년대 원두커피라고 부르던 것이었다. 당시의 그것보다 농도가 진하긴 하지만 탁월하고 부드러운 풍미를 가진 그 커피는 다시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 그렇게 나의 최애 커피가 되었다.

찬란하게 빛났던 나의 청춘의 시대, 90년대가 벌써 20년도 훌쩍 넘은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딸아이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엄마 혹시 개화기나 조선시대 사람이었냐며 놀리기 일쑤다. 유행은 돌고 돌아 거리엔 크롭티에 와이드 팬츠 물결, 레트로풍 음악 등 20세기 말 문화나 패션이 다시 유행하고 있지만 어느덧 그 시절 추억과 이야기들은 슬슬 클래식이 되어가는 듯하다. 그만큼 X세대는 완연한 기성세대, 꼰대에 라떼족이 되어간다는 의미일 테다.


알파벳에 편견을 갖지 마세요.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입니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어느 공익광고의 카피다. X세대, Y세대, MZ세대... 알파벳으로 세대를 나누며 그들의 성향을 논하며 사회에 세대의 갈등이 만연하기에 만들어진 광고일 것이다. 돌고 돌아 와이드 팬츠, 돌고 돌아 브루 커피를 좋아하게 되듯 세대 차이는 세대의 다름이 아닌 개인의 다름일 뿐이라고 말하는 걸까.



10년 전이든 20년 전이든 100년 전이든 인생의 고난과 세상의 팍팍함은 변함없이 존재해왔다. 거친 세상에서 버티고 힘든 삶을 견디며 살아내게 해 주었던 것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 속 작은 행복을 찾는 일이었다. 20세기였던 90년대, 21세기인 2022년 현재, 세기는 바뀌었지만 과거의 추억과 현재의 삶, 미래에 대한 기대로 인간이 살아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어제의 라떼오늘의 커피든, 고통과 불안이 가득한 삶 속에서 일상의 작은 행복의 조각들이 우리를 하루하루 살아내게 만들고 성장하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내일 아침에도 한 잔의 커피로, 씁쓸하고도 달콤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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