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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mum Aug 20. 2024

[에필로그] 오늘도 어떻게든 써냅니다

쌀이 되고 흙이 될 나의 글을 위하여

글이란 무엇인가

글이란 쌀이다. 썰로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쌀은 주식에 해당한다. 그러나 육신의 쌀이 아니라 정신의 쌀이다. 그것으로 떡을 빚어서 독자를 배부르게 만들거나 술을 빚어서 독자들을 취하게 만드는 것은 그대의 자유다. 그러나 어떤 음식은 만들든지 부패시키지 말고 발효시키는 일에 유념하라. 부패는 썩는 것이고 발효는 익는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그대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글쓰기의 공중부양』  이외수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들 하는데 이외수 선생 또한 글이란 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박완서 선생께서 좋은 글이란 향긋한 포도주가 될 포도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좋은 재료를 부패시키지 말고 적절한 온도와 습도를 갖추어 풍미 있게 발효시켜서 독자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말씀이겠지요. 적절한 소재와 주제도 중요하지만, 위의 글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는 '글에는 작가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난다'라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책에서 이외수 선생은 글과 인품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쁜 놈은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
어떤 놈이 나쁜 놈일까.
나는 딱 한 가지 부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바로 나뿐인 부류다. 그러니까 나뿐인 놈이 바로 나쁜 놈이다. 개인적으로 나뿐인 놈이 음운학적인 변천과정을 거쳐 나쁜 놈이 되었다는 생각이다. 남들이야 죽든 말든 자기만 잘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들은 무조건 나쁜 놈에 속한다.
도대체 우주 어느 공간에서 어떤 존재가 나뿐 일 수 있단 말인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먼지 한 점일지라도 만우주와 연결되어 있으며 저마다 존재할 이유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나뿐인 듯이 살아가는 놈들이 있으니 그들이 어찌 좋은 글을 쓸 수 있기를 기대하랴.

글은 쓰는 자의 인격을 그대로 반영한다. 사물의 속성을 파악하는 일은 사물과의 소통하는 일이며 사물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일은 사물과의 사랑을 시도하는 일이다.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나뿐인 놈들에게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글을 읽고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교양을 쌓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문학, 영화, 음악, 그림 등을 감상하면서 나와 상관없는 타인의 삶과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접합니다. 즉, 나만의 세상에 갇히는 것이 아닌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과 다양한 세상의 삼라만상을 접할 수 있습니다. 이외수 선생이 말씀하신 사물과 소통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주변에 나뿐인 나쁜 놈이 있다면 한번 잘 관찰해 보세요. 무엇보다 책은 잘 읽지 않을걸요 ㅎㅎ) 책을 많이 읽고 음악을 깊이 있게 듣고 그림에 조예가 있는 사람들, 이렇게 예술적으로 풍부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반짝이는 눈빛과 그윽한 분위기를 갖고 있습니다. 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 타인과 세상에 대한 깊고 넓은 관심과 경험은 험난한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나침반이 되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삶을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면, 왠지 모르게 바르고 멋지게 산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작가의 인격에 대해서 더 말하는 것은 입이 아픈 일이겠지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무작정 부러워할 일이 아니다.
산이 진실로 아름다운 산으로 존재하려면 거대한 바위 덩어리로는 어림도 없다. 수많은 세월을 거치고 수많은 풍상을 겪어야 한다. 견고한 바위 덩어리로서의 실체와 속성을 버리고 수만 년동안 갈라지고 바스러져서 부드러운 흙의 실체와 속성을 얻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수많은 생명체들을 키울 수 있다.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되기를 소망하지 말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평지가 되기를 소망하라. 한 글자 한 문장이 그대가 허무는 살과 뼈가 되기를 소망하라. 그대가 허무는 살과 뼈들 속에서 수많은 생명과 영혼들이 무성하게 자라 오르기를 소망하라.


 40대 중반이 넘어가면 이 나이 되도록 인생에서 뭐 하나 제대로 해놓게 없는 것은 허망함과 우울이 시도 때도 없이 쓰나미처럼 몰려옵니다. 아니 에르노는 말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은
시간이 향하는 길에서 빠져나와
멈춰 서는 것,
혹은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서
무엇인가를 구해내는 일이다.


 엄청난 유속으로 흐르는 시간이라는 강에서 우뚝 버티고 설 수 있는 힘은 바로 글쓰기에서 나옵니다. 저의 경우, 그토록 원하던 글 쓰는 사람이 되어 살고 있으니 그 모습은 아직도 어정쩡하고 불안 불안하긴 하지만 시간의 강에서 어쨌든 버티고 서있기는 한 거 아닐까요? 그러니 이제는 쓸모없는 나이타령, 신세타령은 그만두려 합니다. 결국 글을 쓰기까지 지나온 제 삶의 여정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닌,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바위덩이가 비와 바람을 맞으며 차츰차츰 평지의 흙이 되기 위해 바스러져가는 과정이었다고 제 멋대로 생각하려 합니다. 수많은 생명과 영혼이 자랄 수 있는 비옥한 흙이 되는 길은 아직도 멀고도 험하지만 그 길은 기꺼이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늘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으면 '‘과연 내가 제대로 써낼 수 있을까?’' 어김없이 걱정과 두려움이 앞섭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장과 단어의 숲에 푹 빠져 그 속을 헤매며 정신없이 자판을 두드리다 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그럭저럭 봐줄 만한 초고가 완성됩니다. 늘 바보처럼 똑같은 걱정과 고민이 저를 괴롭히지만, 이제까지 어떻게든 써왔듯이 앞으로도 어떻게든 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늘도 어떻게든 써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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