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해빠진 X세대를 위하여
90년대에는 라떼가 없었다? 정답은 No! 다만 그 시절 우리나라에는 유럽 체류 경험이 있는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태리식 에스프레소 커피 문화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을 뿐 라떼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1999년 스타벅스가 한국에 론칭하면서 비로소 에스프레소 커피와 라떼가 대중화되었다. 80년대까지 인스턴트커피에 설탕, 프림을 타서 먹는 다방커피에 익숙하던 우리는 90년대 들어 커피메이커나 모카포트를 이용하여 종이필터 위에 곱게 간 원두를 넣고 뜨거운 물을 내려마시는 지금의 드립 커피와 비슷한 추출 방식의 이른바 원두커피를 주로 마시게 되었다. 90년대를 지나 21세기에 들어서며 스타벅스를 필두로 곱게 갈아 압축한 원두가루에 뜨거운 물을 고압으로 통과시켜 진한 커피추출액을 뽑아내는 이탈리아 방식의 에스프레소 커피 문화가 대중화되었다. 스타벅스의 다크하고 강렬한 원두와 고유의 레시피가 만나 카페라떼, 카푸치노, 카페모카, 캐러멜 마키아토 등 당시엔 생소했던 이탈리아어 이름을 가진 커피 음료들은 어느새 우리 생활 속 친숙한 단어들이 되었다.
90년대 초중반부터 대학가나 시내 중심가에는 기존의 어두컴컴한 카페와 달리 환하고 모던한 인테리어의 커피전문점이라는 것이 우후죽순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의 커피전문점과는 여러모로 사뭇 달랐는데 주문과 픽업은 지금의 커피전문점처럼 셀프로 하기도 했고 서버가 주문을 받고 테이블까지 서빙을 해주기도 했지만 메뉴판의 내용만큼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커피의 경우 블루마운틴, 킬리만자로, 모카, 헤이즐넛 등 다양한 커피 원두의 종류가 메뉴에 나열되어 있었다. 원하는 원두의 커피를 주문하게 되면 지금처럼 큰 머그잔이 아닌 로열 알버트나 웨지우드 같은 작은 찻잔과 차받침 세트에 갓 내린 맑은 커피가 나왔는데, 찻잔 옆에는 젤리뽀(20대 이하 젊은 친구들은 젤리뽀가 뭔지도 모르겠지;;)와 비슷한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있는 액상 크림과 각설탕 그리고 경우에 따라 달디 단 로터스 캐러멜라이즈드 비스킷이 살포시 곁들여 나왔다.
아이리쉬 커피나 비엔나 커피 등 지금의 라떼처럼 우유나 생크림을 커피에 넣어주는 음료가 있긴 했지만 흔히 마시지는 않았고 우유를 첨가하고 싶으면 원두커피에 액상 크림을 넣어서 먹곤 했다.
필자는 박식한 커피 애호가도 아니고 이 글은 커피 문화나 변천사 등을 전하는 커피에 대한 전문적인 글도 아니다. 다만 90년대라는 시간과 이제는 40대 기성세대가 된 X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장황하게 커피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94학번인 필자는 IMF의 포화의 여파가 미치기 직전 막차를 타고 여의도에 위치한 금융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고단했던 신입사원 시절, 6천 원짜리 점심을 사 먹으면서도 커피는 스타벅스에서 바닐라라떼나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사 먹었다. 밥 보다 비싼 커피를 사 먹으면서도 그 맛이 주는 짜릿함과 공간이 주는 휴식 덕분에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기존에 학생 때 마셔왔던 원두커피와는 전혀 다른 진하고 빈틈없이 중독성 강한 맛과 여유로운 공간은 당시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가끔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에스프레소 커피보다 여백이 느껴지는 90년대에 마시던 맑은 원두커피가 그리워지고는 했다.
어쩌면 X세대는 스타벅스식 에스프레소 커피가 등장하기 전 90년대 커피전문점의 블루마운틴 또는 헤이즐넛 커피 같은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언뜻 보면 이전 세대보다 세련되고 감각적인 듯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클래식하고 순해빠진… 에스프레소보다 향도 색깔도 훨씬 연하고 맑던 그 커피... 인스턴트 다방커피가 유일했던 기존의 베이비부머 세대나 586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신선한 감각과 가치관을 지니고 있지만 여전히 우직하고 착해빠진, 개성과 색깔이 조금은 흐릿한 모습...
누군가는 X세대를 ‘꼰대가 되고 싶지 않은 꼰대’라고 했던가. 아날로그와 디지털 양자에 모두에 능하고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젊고 세련된 외모와 감각을 소유하고 있으며 마음만은 MZ세대 못지않다고 우겨보지만, 몸은 이미 개인보다는 조직을 향해 치우쳐져 있어 애써 쿨한 척 후배들의 가치관을 향해 돌리려고 해도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감과 목소리를 낮추고 희생해가며 조직의 성장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묵묵히 노력하고 있는 순하고 착해빠진 사람들... 그들의 어깨는 하루하루 무거워지고 축 쳐져만 간다.
90년대에 20대인 그들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다 해서 X세대라고 불렀고 이전 세대와 확연히 다른 개성과 문화를 소유했던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랬던 그들은 꽃중년이라는 허우대만 멀쩡한 껍데기 같은 미사여구 뒤에서 숨어서 '선배들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라고 되뇌고 있지만, 위아래 세대 사이에서 치이며 팍팍한 현실 속에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민주화를 이룬 60년대생과 척박해진 취업과 부동산 시장 등의 영향으로 비혼, 워라벨을 거리낌 없이 주장하는 8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MZ세대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X세대는 낀 세대, 개성 없는 세대, 존재감 없는 세대로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로 인해 사회가 조금씩 조금씩 밝고 정의롭고 참신하게 변화하고 있음을 방구석에서 글을 쓰고 있는 필자마저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나와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 세대이기 이전에 삶의 여유와 멋, 공정과 합리적인 삶을 살기 위해 늘 노력하는 그들을 나는 평생 응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리타분한 라떼족이 아닌 신맛과 쓴맛의 밸런스가 탁월한 핸드드립 커피처럼 선하고 조용한 리더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그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