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그 해 우리는

그 사랑의 결말에 대하여

by Minimum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드라마들은 출생의 비밀이 있거나 원수 집안 남녀가 사랑에 빠지거나 아니면 병원, 회사, 학교 등 배경만 바뀔 뿐, 그 어디서든 연애하는 스토리(대개 처음에 서로에게 비호감을 갖고 티격태격 싸우고 지지고 볶던 남녀가 결국은 사랑애 빠지게 되는 천편일률적인 스토리)를 가진 드라마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 <프리즌 브레이크>를 필두로 사람들은 영화보다도 더 스펙터클하고 다양한 장르의 촘촘한 구성을 가진 미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질세라 우리나라 드라마들도 점점 스케일이 비대해지고 판타지, 미스터리, 호러 등 장르가 다양해졌으며 치밀한 구성과 뒤통수를 치는 반전의 연속으로 다음회를 보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폐인을 양산하는 탁월한 퀄리티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튜닝의 마지막은 순정이라고 했던가. 화려하고 복잡하고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어려운 드라마에 잠시 싫증이 난 걸까. 예전의 순수하고 해맑은 로맨스물들이 새삼 그리워졌다.



필자는 요즘 오랜만에 만나는 맑은 수채화 같은 드라마 <그 해 우리는>에 푹 빠져있다. 한 줄 작품 소개는 헤어진 연인들의 역주행 로맨스. 고등학교 시절, 전교 1등 국연수(김다미)와 전교 꼴등 최웅(최우식) 두 사람은 그들을 가까이서 관찰하는 다큐를 함께 찍으며 사랑에 빠진다. 평범한 듯 꾸밈없이 담백한 그들의 외모처럼 두 사람은 풋풋하고 아름다운 청춘의 사랑을 만들어 간다. 하지만 달콤한 꿈같은 행복도 잠시, 연수는 자신의 지독한 가난과 불행, 웅의 부유하고 행복한 가정 사이의 괴리를 절감하며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하고 떠나버린다. 실연의 아픔에 오랫동안 괴로워하던 최웅은 그림을 시작하며 상처를 극복하여 작가로 성공하고 연수 또한 능력 출중한 커리어우먼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10년 후 다시 만난 두 사람의 다시 시작되는 사랑이야기가 파스텔처럼 해사하게 펼쳐진다.


누구나 10대와 20대를 걸쳐 한번쯤은 열병 같은 사랑을 한다. 첫사랑이든 짝사랑이든 미친 듯이 연애하고 사랑했지만 결국 놓쳐버린 사랑이든... 연수와 헤어진 웅이는 불면증에 시달리지만 연수가 옆에 있으면 이내 깊은 잠에 빠진다. 대단히 잘생기거나 예쁘다거나 성격이 좋다거나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닌데 왜 꼭 그 사람이어야 했을까.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나는 그(그녀)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절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었던 걸까.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하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웅을 잊지 못하고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연수는 말한다.


우리가 헤어진 건 다 내 오만이었어
너 없이 살 수 있을 거라는 내 오만


이별 후 10년 만에 다시 만난 후 혼란스러워하다 결국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두 사람. 웅은 연수에게 말한다.


보고 싶었다, 국연수
보고 싶었어 항상
보고…싶었어
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네가 내 앞에 있는데
이상하게 너한테 너무 화만 나고
네가 너무 밉고...
근데 이제 알 거 같아
그냥…
네가 나를 사랑하는 걸 보고 싶었나 봐
나만 사랑하는 널 보고 싶었나 봐
연수야, 나 좀 계속 사랑해줘
놓지 말고 계속 계속 사랑해
부탁이야


늘 활달하고 밝은 캐릭터를 보여줘서인지 자칫 가벼워 보이던 최우식 배우의 절절한 사랑 고백에 내 눈가도 그만 촉촉해져 버렸다. 놀이동산에서 손에 들고 있는 예쁜 풍선을 놓쳐버린 아이처럼 떠나가는 사랑을 보며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대부분의 우리들은 용기 있게 서로의 진심을 나누고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깊은 울림과 부러움을 느꼈으리라.

어긋나는 타이밍, 서로에 대한 오해와 성급한 예단, 쓸데없는 자존심 등... 말도 안 되는 치기 어린 이유로 이별을 하고 아파했던 우리들의 사랑은 세월이 흘러도 아련하게 가슴 한편에 남아 있다. 20년도 훌쩍 지나버린 90년대식 사랑은 지금보다는 못내 답답하고 유치하고 그렇게 황망하게 지나가 버렸지만 그 진심과 추억들은 우리의 삶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우리의 영혼을 한 뼘 더 성장시켰다. 다시 사랑을 찾은 웅은 행복에 젖이 이렇게 되뇐다.


연애라는 건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 같아요
그 세상은 나하고는 썩 맞지 않지 않는 세상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에도 지금도
그 세상에서 계속 살고 싶은데...
끝이라는 건 없이 영원히…


생면부지 타인과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건 모래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는 기적과도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취향도 성격도 가치관도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이기에 서로의 세상은 어색하고 불편해서 나에게 썩 맞지 않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기에 웅이의 말처럼 두 사람만의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것이 바로 사랑일 테다. 그 사랑은 이루어질 확률보다 이루어지지 못할 확률이 더 많지만 그래도 우리는 온몸이 다 타버릴 것을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사랑의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든다.


드라마처럼 그 사랑의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지금은 더 이상 두 사람이 함께하지 못할지라도, 그때 그 사랑은 우리의 가슴과 이 세상에 남아 있기에… 그 사랑은 새드엔딩이 아닌 예술성 잔뜩 머금은 열린 결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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