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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Sep 04. 2019

영화광의 고백(6) - '사랑의' 순간들

현실에도 리플레이가 있다면

  어릴 적 우리 외갓집은 김해에 있었는데 200평대의 넓은 부지에 지은 총 3층짜리 주택이었다.(제한이 풀린 허허벌판에 처음 집을 지어 지역 뉴스에도 나왔던 기억이...) 지하에는 운동을 즐기던 외할아버지의 개인 헬스장(ㄷㄷㄷ)이 있었고 1층에는 응접실과 부엌 그리고 외증조할머니 외증조할아버지의 침실과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침실이 있었고 2층에는 작은 외삼촌이 쓰던 방과 거실이 있었다. 1층에서 2층으로 가는 계단 복도에는 달마대사의 그림이 있었는데 나는 그게 너무 무서워서 항상 눈을 질끈 감고 계단을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넓은 정원에는 사과나무며 여러 가지 꽃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는데 엄마 말로는 셋째 사위인 우리 아빠가 그걸 다 심었다고....... 명절이면 그 집에 친척들이 한데 모였다. 집이 큰데도 어찌나 북적이던지. 사촌들과 나는 커다란 정원에서 호스로 물을 뿌리며 놀았고 나무 뒤에 숨어 숨바꼭질을 했다. 외할아버지는 해병대에서 오래 복무한 군인 출신이셨는데 엄청 무서웠다. 호랑이 같이 생긴 그 얼굴을 떠올릴 때면 아직도 심장이 쪼그라든다. 외할아버지는 쿵쿵 거리며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셔서 우리는 항상 까치발을 들고 조심조심 방안을 돌아다녀야 했다. 


  큰외삼촌이 결혼을 하고 얼마 후였다. 큰 외숙모는 하얀 피부에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휘날리며 부드러운 말투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린 시절을 쭉 경상도에서 보낸 나는 서울 말씨를 듣자 괜히 긴장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큰 외숙모는 나를 씻겨 주었고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나는 목욕을 마치고 외숙모의 머리를 땋아주었고 동네 비디오 가게에 가서 두 편의 영화를 빌려 같이 보았다. 그 영화들은 바로 타임루프의 영화의 레전드라 불리는 <사랑의 블랙홀>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싱그러운 젊음을 느낄 수 있는 <사랑의 동반자>였다. 



<사랑의 블랙홀, 1993> 누군가 꼬깃꼬깃 접어 간직한 포스터인가? 다음 영화 페이지에 올라온 공식 포스터인데...



눈 뜨면 항상 같은 날(그라운드호그 데이), 아침 6시



반복되는 시간 속에 조금씩 삶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필 코너스(빌 머레이)의 달라진 눈빛


  사랑의 블랙홀은 너무나 유명한 영화라 사실 스토리를 언급하는 것조차 식상할 정도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 인생이 지루하고 직업마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기상캐스터 필 코너스는 투덜거리기 일쑤다. 사람들에 대한 배려도 없고 부적절한 농담으로 상대방의 기분을 망친다. 그런 그가 그라운드호그 데이를 취재하기 위해 내려간 지방의 어느 도시에 갇힌다. 그러니까 공간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안에. 매일 눈을 뜨면 새벽 6시, 허름한 여관이며 어제 봤던 일이 오늘도 반복된다. 자살시도도 하고 현금수송차량을 탈취하기도 하지만 다음 날이면 모든 것이 다시 반복. 결국 필 코너스는 조금 더 가치 있는 오늘을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를 성실히 보내고 PD인 리타(앤디 맥도웰)와도 사랑을 이룬다. 지금이야 타임루프를 주제로 한 영화가 굉장히 많지만 당시에 시간이 매일 반복된다는 설정은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외숙모와 나 그리고 사촌들은 하루가 저렇게 반복된다면 무슨 일을 할지 제각각 떠들어 대곤 했다. 영화 속에서 가장 부러운 점은 필 코스너가 피아노를 배우는 장면이었다. 그는 결국 숙련된 피아노 연주를 사랑하는 그녀 앞에서 멋지게 뽐낸다. 여자는 그런 모습에서 반전미를 느낀다. 만약 요즘 나에게 저렇게 반복되는 하루가 주어진다면 나는 방탄소년단의 fire 안무를 배우고 싶다. 



<사랑의 동반자, 1993> 왜 다음 영화 페이지에 있는 포스터들은 다 접혀 있는 거지?


잔망스러운 춤사위. 그러나 노래 가사는 좀 부적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전쟁에 대한 노래가 그랬던 듯.


흑인 아주머니가 빙의되었다. 허리에 손을 올리고 여자 말투를 따라 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연기 잘하는 건 변하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다음으로 본 영화는 <사랑의 동반자>였는데 당시 비디오 가게에서도 인기가 많았고 <주말의 명화>에서도 틀어줬는데 생각보다 기억을 하는 사람들이 드물다. 내용은 이렇다. 한 날 한 시 교통사고를 당한 4명의 영혼들이 당시 사고 현장에서 태어난 아기 토마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주위를 맴돌게 된다. 맑은 영혼을 지닌 아기는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을 볼 수 있었고 자라면서도 쭉 그들과 친구로 지낸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급기야 토마스의 아버지는 그를 정신병원에 보내려 고민한다. 결국 영혼들은 떠난다. 하지만 영혼들이 하늘로 올라갈 시간이 임박해지자 생에 못 이룬 한을 풀기 위해 어른이 된 토마스를 다시 찾고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영화의 재미는 젊은 시절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과 영혼들에 빙의된 그가 각각의 캐릭터에 맞게 잔망스러운 연기를 펼친다는 점이다. 만약 로다주가 마약 문제가 없었다면 이때부터 계속 슈퍼 스타의 길을 걷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매력적인 외모에 출중한 연기력과 섹시한 목소리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는데. 


  우리는 작은 외삼촌의 방에서 저 영화들을 보았다. 매트가 두 개나 깔린 그 방에 옹기종기 모여 영화를 보며 치토스와 새우깡을 투게더에 찍어 먹었던 것 같다. 외숙모는 시댁이라 불편했을 텐데도 금세 우리와 친해져 같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때 큰 외숙모가 입었던 핑크 스웨터의 촉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간이 지나며 친척들은 서로 다른 도시에 흩어져 살거나 바쁜 생업을 이유로 제대로 모이지 못했다. 나도 10대가 되면서부터는 명절에 부모님을 따라나서는 일이 줄어들었다. 저 날 함께 모였던 사람 중 어른 몇몇은 세상을 떠났다. 사실 그들의 얼굴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저 두 영화를 함께 보며 깔깔 거리며 웃었던 날만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소중한 나의 마들렌이 되어 준 두 영화에 '사랑의'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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