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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Aug 28. 2019

영화광의 고백(4) - 마법의 황금 티켓

요행을 바라지 말기로 함

  실버스타 스탤론의 (산악 고공 로프) 손목 액션으로 유명했던 클리프행어와 휘트니 휴스턴과 케빈 코스트너의 팬시한 멜로 보디가드, 탄탄한 각본이 인상적이던 군법정물 어퓨굿맨과 샤론 스톤이라는 섹시스타의 탄생을 알리던 원초적 본능이 비디오 대여 순위의 상위권을 점유하고 있던 그때, 거부할 수 없는 대작들 사이에서 선전을 펼치던 판타지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마지막 액션 히어로!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실버스타 스탤론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마.액.히>를 보고 완전히 아놀드로 돌아서게 된다.


  비밀의 장소로 우리를 초대할 (한정수량의) 마법 티켓이라고 하면 요즘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나에게 마법 티켓이란,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손에 들린 바로 저 황금 티켓이다. 마지막 액션 히어로의 주인공인 대니는 나처럼 영화를 매우 좋아하는 아이다. 특히 '잭 슬레이터 시리즈'를 좋아하는데 잭 슬레이터라는 주인공이 악당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응징하는 전형적인 마초 액션물이다. 대니는 극장 영사 기사 할아버지에게서 황금티켓을 얻게 되고 자신의 영웅인 잭 슬레이터가 존재하는 영화 속 세계로 빨려 들어가 흥미진진한 모험을 펼친다.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대니를 누구보다 부러워했다. 나도 그런 상상을 종종 했다. 거대한 극장 화면이 아니라도 좋으니 사다코처럼 브라운관을 자유자재로 넘나 들며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하기를!(물론 그런 상상을 할 때 사다코는 아직 현실 세계에 등장하기 전이다)

  나의 가슴을 요란하게 두방망이질 치던 여러 영화 중 당시 으뜸으로 뛰어들고픈 영화가 있었으니, 소녀의 감성을 촉촉이 적셔주던, 안 보면 안 봤지 한 번 보면 계속 돌려보게 된다는 명작 중의 명작 마이걸이었다.

 


  여전히 사랑스럽고 애틋한 이 영화는 내 또래의 아이들이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공감대를 형성하기 충분했다. 특히 돌아가신 엄마를 잊지 못하는 베이다의 쓸쓸한 뒷모습을 볼 때면 괜히 가슴이 찡해 눈물을 찔끔 거리기도 했다. 맥컬린 컬킨의 리즈 시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영심이의 안경태를 떠올리게 하는 꺼벙이 토마스로 분해 조금은 바보 같지만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했다. 극 중 베이다도 토마스를 그렇게 느꼈는지 둘은 사랑과 우정 사이를(자기들은 모르지만) 왔다 갔다 하며 풋풋한 설렘을 안겨준다. 특히 영화에 등장하는 베이다의 애장품인 알반지는 기분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데 영화가 히트 친 후 이 반지 또한 유행을 타며 모든 문구점에서 구입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반지가 화근이 되어 베이다에게 한 번 더 슬픔이 찾아온다. (나도 얼마나 울었다구) 다행히 새엄마의 노력으로 베이다는 다시 마음을 열고 상처를 치유해나간다. 

  남녀 칠 세 부동석이라는 낡고 낡은 유교적 관념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던 그때, 남자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은 편을 갈라 영역 다툼을 벌였고 학교가 파한 후 동네에서 같이 노는 모습이 포착되기라도 하면 다음 날 학교 책상에는 어김없이 이런 낙서가 쓰여 있었다. "얼레리 꼴레리 안경태랑 영심이랑 좋아한대요." 별 것도 아닌 농담이 인생의 거대한 스캔들처럼 느껴지던 그때 우리는 이성 친구 앞에서 애써 웃음을 참으며 의미 없는 다툼을 이어나갔다. 그런 시국(?)에 감상한 마이걸은 작은 나의 가슴을 무작정 일렁이게 만들었다. 나에게도 저런 단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나에게도 어설픈 키스를 연습하고도 금세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남사친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판타지 아닌 판타지를 갖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내가 마이걸 속으로 들어간다면 반드시 저 아이들에게 닥칠 불행을 막아주겠다고. 


  마이걸 외에도 황금티켓을 통해 공유하고 싶은 삶이 있었으니,

  

<내사랑 컬리 수> 뽀글머리 컬리 수는 사고뭉치 싱글대디의 등불 같은 존재다. 저 통통한 볼에 입을 맞추고 꼭 껴안아 주고 싶었다.


<베이비 데이 아웃>  영유아 특유의 돌발행동으로 악당을 골탕 먹인다. 지금 생각하면 판타지 중의 판타지가 아닐까 싶다.


<시스터 액트> 당시 최고의 여자 개그맨이었던 우피 골드버그의 연기에 완전히 매료되어 나 또한 개그맨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주옥같은 메들리에 흥겨워 어깨가 들썩인다.


  하지만 황금티켓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는데 영화의 러닝타임이 끝나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똑같은 희로애락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를 무한히 돌려볼 수 있는 것은 정확히 몇 분 몇 초에 등장할 소중한 씬들 때문일 것이고 우리가 이 영화의 위기들에도 불안하지 않은 것은 결국은 그들이 해피엔딩을 맞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이런 식으로 반복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여러 해를 보내며 행복은 결국 찰나의 순간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무수히 행복에 대해 떠들지만 행복이 좀처럼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언제나 소리 없이 찾아왔다가 삶을 반추하는 와중에야 그 순간이 행복이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내 인생만큼은 처음 보는 영화의 씬들처럼 새롭길 바란다. 그래서 어른이 된 나는 황금 티켓을 포기하기로 했다. 다만 작은 소망이 있다면, 내 삶의 많은 순간들이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충분한 해피엔딩처럼 유쾌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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