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존치즈버거 Aug 23. 2019

영화광의 고백(2) - 그렇게 돌리다간 돌아버릴지 몰라


  비디오 가게 사장님들이 으뜸으로 좋아하는 고객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비디오 반납 기일을 잘 지키는 고객이었다. 하지만 사장님들이 마음으로 감동하는 고객이 있었으니 "Be Kind Rewind" (부디, 비디오테이프는 되감아서 돌려주세요라는 뜻) 원칙을 항상 준수하는, 바로 나 같은 고객이었다.

  


비디오를 반납하러 가면 사장님들은 되감기가 되어 있지 않은 비디오들을 바로 VHS rewinder라고 불리는 기계 집어넣었다. 리와인더들은 대부분 빨간 자동차였다.

   

  나는 마음에 드는 비디오는 한 자리에서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그러니까 한 번 보고 '이거 나중에 또 봐야겠다.'라고 생각하며 텀을 두고 같은 영화를 시청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끝나는 순간 비디오 플레이어의 되감기 버튼을 눌러 반복 시청하는 것이었다. 다음 편에 소개할 (내 인생의 첫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 백발마녀전(장국영, 임청하 주연 1993년작) 같은 경우, 한 자리에서 연속으로 4번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내가 어른되면 경험할 세계라 믿었고 비디오를 보며 미리 간접경험을 하면 조금 더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비디오를 왕창 몰아보다 점심에 가게에서 밥을 먹고 다시 집으로 쪼르르 달려가 엄마가 돌아오는 시간까지 비디오를 봤다. 부모님은 혼자 집에 남아 시간을 보내는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주말 특식(잡탕밥이나 탕수육)을 제공했지만 나는 잡탕밥이고 나발이고 빨리 밥 먹고 집으로 돌아가 블랙조를 먹으며 비디오 볼 생각만 가득했다.                                                                   


  스플래쉬를 거쳐 구니스를 통해 해저동굴을 탐험하고 영구와 땡칠이를 보며 배꼽을 잡고 쉬맨을 보며 우주적 세계관을 키워가다 취권을 통해 진지하세 무술을 배우고자 열망하던 어린이는 어느덧 국민학생이 된다. 그리고 첫 시험에서 (당시에는 옆집 동수도 뒷집 민정이도 다 받는) 올백을 맞으며 평일에도 홀로 집에 머물며 온종일 비디오를 볼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당시 엄마의 걱정은 그 성격이 조금 변질되는데 "난 이 세상의 모든 비디오를 다 볼 거야."라고 위풍당당하게 말하는 내 모습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그냥 비디오 가게를 차린다 그래."라는  엄마의 농담은 내 삶의 모토가 된다. 나는 학기초 자기소개를 하는 판넬에 내가 본 비디오와 영화배우와 감독의 이름을 빼곡히 적어 넣었다. 내가 본 영화가 나의 정체성이 되었고 누군가가 재밌게 본 영화로 그 사람의 성향을 판가름했다.


  미친 듯이 비디오를 되감으며 감동의 폭포수 아래 돌아버릴 지경으로 울고 웃던 나의 행위는 부모님의 제지를 받고서야 중단되었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아무리 늦어도 10시 전에는 취침해야 한다는 가풍 아래 눈물을 머금고 침대에 머리를 뉘이면 눈 앞에서 아른아른 영화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까 내가 품행 단정한 고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으뜸고객이 되어야겠다는 사명감에 서라기보다는 영화에 대한 애정 어린 집착이 만든 행위였다. 되감은 비디오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기엔 배고프고 졸린 어린이의 체력적 한계와 귀찮은 숙제들과 기한을 넘기면 얄짤없이 부과되는 연체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쉬움과 함께 축 처진 어깨로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아, 진짜 한 번 더 볼 수 있었는데." 그러나 곧, 혼잣말이 무색하게 반짝반짝 광을 내는 신작 비디오들에 흥분하기 시작했고 엄마를 졸라 15세 관람가까지는 거뜬히 빌릴 수 있었다.


<기묘한 이야기>가 있기 전에 <구니스>가 있었다. 어린이들의 유쾌상쾌액션활극! 슬로스의 대활약이 눈물샘을 자극한다.


소림사 스님의 입이 오물거리자 생 당근이 생성(?)되는 충격적인 편집 효과에 경악한 기억이...


<아이가 커졌어요>는 <애들이 줄었어요>의 후속 편이다. 아빠의 실수로 거인이 된 만 2세 아기의 의도치 않은 재물손괴가 박장대소를 유발한다.


웬디를 따라 인간 세계에 머물며 어른이 된 피터팬이 네버랜드를 다시 찾으며 벌어지는 이야기. 친근한 이미지의 더스틴 호프만이 후크로 분한 사실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부정취업, 횡령과 음모, 부적절한 유혹 그리고 뜨거운 우정과 사랑이 난무(?)하던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의 상징은 존 굿맨이 외치는 야바다바두!


   위 영화들을 적어도 10번은 돌려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돌려보는 사이 나의 시력은 저하되고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안경잡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날 놀리던 애송이들아, 미래에는 라섹이라는 게 존재한다~ 이 말이야!) 나이를 먹으며 영화의 완성도에 이러쿵 저쿵 토를 다는 엄격한 관객이 되어버렸지만, 내 유년의 영화들에는 한없이 관대해지고 만다. 내 추억을 빈틈없이 채색해주던 장면과 장면들. 하지만 그러한 반복 속에서도 영어만큼은 깨우치지 못한 걸 보면 썩 머리가 좋은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안타깝지만 받아들여야지. 


이전 01화 영화광의 고백(1) - 양육은 비디오에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