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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Aug 24. 2019

영화광의 고백(3) - 내 인생의 첫 빨간 비디오

청불은 나를 슬프게 해

  


  그 당시 어린이들에게는 호환, 마마,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무분별한 불법 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청소년이 되는 것이었다. 건전한 비디오로 맑고 고운 심성을 길러야 한다는 경고문을 무시한 채, 나는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던 10살 무렵 인생의 첫 미성년자 관람불가 비디오를 보게 된다. (등급마다 색깔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전체관람가는 초록, 12세 관람가는 파랑, 15세는 관람가는 노란색이었다. 당시에는 12세, 15세가 아닌 중학생 이상 고등학생 이상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손에 닿기만 해도 잘못이나 저지른 듯 가슴이 콩닥 거리던 미성년자 관람불가는 영화의 색깔은 빨강이었다.)

  내가 자주 들르는 비디오 가게는 3군데였다. 그중 가장 애용하던 비디오 가게는 친구 둘이서 동업을 하는 비디오 가게였는데 일정 금액의 회원비를 미리 내고 전화로 비디오 제목과 주소를 대면 그 다음날 오전 문 앞까지 친절하게 배달해주는 시스템이었다. 비디오를 빌리던 초반에만 해도 엄마는 내가 보고 싶은 영화의 내용과 관람등급을 확인했다.


"매번 딱지 맞는 기분,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카피도 있었다...

  오석근 감독이 만들고 김희애와 문성근이 출연한 <101번째 프로포즈>의 예고편을 티브이에서 보고 엄마에게 빌려 달라고 했다가 퇴짜를 맞았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커다란 뿔테 안경을 낀 문성근이 김희애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구애를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섬뜩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당시에는 문성근이 연애도 제대로 못 해본 순정남 같은 캐릭터로 나와 티브이에서 광고를 아주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나는 규칙과 룰을 준수하는 모범 어린이였음으로 엄마의 단호한 거절에 웬만하면 전체관람가 등급의 비디오로 선택지를 맞추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비디오를 보는 지경에 이르자 엄마는 급기야 비디오 추천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추천한 영화들을 나는 볼 수 없었지만 부모님은 대부분 흡족해하셨다. 가끔 부모님은 자신들이 미리 보고 이 정도면 괜찮다 싶은 중학생 이상 혹은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의 영화들은 내게도 볼 수 있게 허락해주었다. 어떤 영화는 살도 별로 안 나오고 폭력적이지도 않은데 단지 영화가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높은 등급을 받은 영화들도 있었다. 나는 비디오 등급의 이상한 기준들로 인해 일찌감치 부조리를 깨닫고 그 부당함을 엄마에게 토로했다. "아, 진짜, 나 그거 다 아는데! 다 이해할 수 있는데!" 나의 성화에 시달린 엄마는 결국 배달은 시키되 검열은 필수라는 조건을 걸고 파란색과 노란색 비디오들도 빌려주었다. 다행히 (치기 어린 나의 지적 허영으로) 죽은 시인의 사회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명작들이 주로 리스트에 포함되었기에 엄마와 나 사이의 신뢰는 쉽게 쌓일 수 있었다. 


  생업에 의한 고단함으로 나만큼 영화를 열정적으로 볼 체력이 없었던 엄마의 검열은 서서히 느슨해진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는지 자극적인 제목의 영화나 아주 생경한 영화가 아니면 대부분 나의 요구에 부응해주셨다. 그리고 10살 어느 여름, 나는 드디어 첫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게 되었다!


얼마나 가족적인 포스터인가! 외계에서 온 새엄마를 아빠도 아이도 반갑게 맞이하고 있는 이 화목한 풍경이라니...

  

이 포스터를 본 관람객들은 아마 다른 의미의 새엄마를 기대하며 영화를 보러 갔을지도...(저 카피 대체 누가 썼냐!)


  공교롭게도 나는 한 날 한 시 두 편의 빨간 비디오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전혀 내가 의도하지 않은 실수였다. <새엄마는 외계인> 같은 경우, 90년대의 섹스 심벌이라 할 수 있는 킴 베이싱어(그때는 킴 베신져)가 외계의 스파이 신분으로 지구에 왔다가 정보를 빼내야 할 상대와 사랑에 빠지면서 새엄마가 돼버리고 마는 이야기였다. 나는 외계인이 새엄마가 된다는 감동적인 설정에 혹해 하필 그 옆에 19가 그려진 붉은 당구공을 보지 못한 것이다.  물론 언제나 차도녀 아니면 미스터리한 유혹자로 등장하는 킴 베이싱어의 연기 변신도 기대가 되었다(는 변명을 해본다). 우리 엄마도, 아니 엄마가 등장한다는데, 그것도 '새엄마'가 '외계인'이라는데 안 빌려 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장국영과 임청하가 주연이라면 내용이 무엇이든 일단 보는 것으로...


  <백발마녀전>은 주연 배우의 존재만으로도 애틋해지는 무언가가 있다. 아직도 아빠가 내 방문을 열고 장국영의 죽음을 알리던 고3 만우절을 잊지 못한다. 80-90년대는 홍콩 영화의 전성기로 <오복성> <칠복성> <대복성> <쾌찬차>를 지나 <영웅본색><첩혈쌍웅>까지, 명절을 책임지는 특선 영화 대부분이 홍콩 영화가 차지할 정도였다. 임청하와 왕조현이 여성들의 워너비 아이콘으로 꼽히고 장국영은 두 말하면 입이 아프고 그 뒤를 따르는 유덕화, 곽부성, 장학우, 여명은 홍콩의 4대천왕으로 불리며 한국에서도 인기 만점이었다. 오우삼과 성룡식 액션에 버금가는 소재였던 홍콩 무협은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순위 상위권을 차지하며 그 위세를 뽐냈다. 나는 명절에 아빠 옆에서 성룡이나 홍금보 주연의 액션물을 보며 홍콩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우연히 <KBS 주말의 명화>를 통해 본 <천녀유혼><종횡사해>로 인해 장국영에 입덕하게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장국영과 임청하가 주연으로 활약하는 신작 비디오를 빌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엄마는 평소 나의 장국영 사랑을 알고 있었고 무협영화의 시퀀스가 거의 칼싸움, 몸싸움, 젓가락 싸움, 전통악기를 이용한 싸움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편견 때문인지 백발마녀전 또한 쉽사리 수락하고 만 것이다. 비디오가 도착한 토요일 아침, 두 손에 쥐어진 그 선명한 붉은 색감에 그만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백발마녀전>의 내용은 단순하다. 여러 당파로 나뉜 무림의 세계. 각기 다른 당파에서 한 명은 후계자로 다른 한 명은 살인 병기이자 마녀로 길러진다. 명확한 목적이 있었기에 그들의 무술 실력은 강호에서도 상위 1퍼센트에 속하며 막상막하를 다투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둘은 사랑에 빠진다. 무림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고 만다. 온갖 이해관계가 얽힌 방해공작으로 인해 둘은 서로를 오해하고 (오해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새버린 임청하가 등장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 그 가슴 시린 사랑의 과정들은 검지로 시골집 창호지에 구멍을 뚫듯 내 마음을 찢어 놓았다. 물론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답게 중간중간 뜨헉-하는 장면들도 등장했다. 장국영과 임청하가 연못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은 오히려 아름다웠다. 어린이였던 내가 경악한 것은 앞뒤로 다른 성별의 인격이 붙어있는 마교의 수장 길무상이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특히 마교의 구역에서 벌어지던 이상한 잔치(?) 장면. 요사스러운 음악과 함께 근육맨이 가면을 쓰고 춤을 추다 갑자기 근육맨이 반라의 여인이 되어 춤을 춘다. 그 와중에 길무상이 임청하를 유혹한답시고 혀를 날름거리는데 자주 접하지 못한 그로데스크한 분위기에 비디오를 일시 정지하고 숨을 고르기도 했다. 절절한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 콧물 다 쏟은 뒤, 나는 백발마녀전을 앉은자리에서 3번이나 더 보았다. 한 번의 빨리 감기도 없이...... 다행히 그 날 저녁 부모님은 내가 빌린 비디오에 관심이 없었고 나는 혹여라도 비디오가 발각되면 안 본 척 시치미를 떼야겠다는 각오로 두 편의 비디오를 되감기 해놓았다.(그리고 내 방에 숨겨 두었다) 

  

  시각적인 충격이나 마음의 감흥을 남긴 것은 <백발마녀전>이었지만 사실 '아! 어른들은 이런 걸 보고 재미있어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 것은 <새엄마는 외계인>이었다. 외계인이 인간처럼 행동하는 것도 힘들 텐데 뜬금없이 새엄마가 되기란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녀가 들고 다니는 조그마한 핸드백에는 행동 지침을 알려주는 다른 외계인이 동행했는데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을 영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 키스나 섹스 같은 것들이었다. 기본적으로 코미디 장르였던 영화이기에 박장대소하면서도 야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스릴러를 보듯 마음을 졸였다. 


  며칠 전 다시 본 새엄마는 외계인은 또 다른 의미에서 충격이었는데, 아름답고 섹시한 여성에게 부여되던 백치미에 대한 선입견과 여성을 대하는 무례한 방식 같은 것들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시동생이 자기 형이 정신 팔린 틈을 타 형수(외계인)에게 키스하는 장면은 진짜 가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새엄마가 되어버렸던 외계인을 생각하면 웃을 수밖에 없다. 빨간 비디오를 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커다란 비밀을 간직하던 것처럼 느껴지던 그때, 오늘 하루 어땠냐는 엄마의 인사에 죄책감을 숨기며 얼굴이 붉어지던 순진하던 그 어린이가 생각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린아이는 어느덧 쑥 자라 고대 유물의 연대기를 주절거리듯 비디오에 대한 단상을 쓴다. 비디오의 시대가 저물고 이토록 과학이 발전되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그 사이 장국영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임청하는 은퇴를 하고 킴 베신져는 킴 베이싱어가 되고 당대 미남이던 알렉 볼드윈은 후덕해지고 또한 그들은 서로 쌍욕을 주고받으며 이혼하고 킴 베이싱어는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해 개 도살 반대 집회에 참석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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