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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Aug 22. 2019

영화광의 고백(1) - 양육은 비디오에게...

나는 네가 지난 세월에 괴짜라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영화광이었다. 7살 무렵부터였나? 꽤나 성숙했구나 말한다면 오해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 덕분이었다. '때문'이 아닌, '덕분'이 확실하다. 나는 부모님의 적절한 관심과 넘치는 사랑 그리고 어쩔 수 없는 방임 덕택에 내가 원하는 영화는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을 얻게 되었다. 이 점에서 정말이지 우리 부모님에게 큰 절을 올리고 싶다. (같은 이유로 나의 동생은 게임광이 되었고 그와 관련된 이런저런 영향으로 영화연출을 전공하게 되었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며 조금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었지만 영화 이야기를 할 때면 어리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영화라. 내가 7살이던 그 무렵,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스물 하고도 몇 해 전. 나는 우리 동네 비디오 가게의 VIP였다. 나는 지방의 어느 대도시(?)에 살고 있었다. 그 도시는 공업과 조선이 발달했고 그와 관련한 기술로 유명한 곳이었다. 내가 살던 도시에 위치한 국립대학도 공대로 유명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 동네 비디오 가게 사장은 2명의 남자들이었고 그 국립대학의 공대를 거친 인재들(?)이었다. 그들이 학교를 졸업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들은 비디오 가게를 차렸다. 공대생답게 조금 차별화된 점이 있다면, 그들의 비디오 가게는 배달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전화로 보고 싶은 비디오를 전날 고르면 그 다음날 친절하게 문 앞까지 비디오를 배달해주던, 제법 선진화된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비디오를 어떻게 고르냐? 그것은 비디오 가게가 성행하던 90년대, 너무도 당연하게 (비디오 가게마다 무료로) 배치된 비디오 가이드 덕분이었다. 사실 비디오 가이드조차 맞는 이름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 역사가 MBC의 <출발 비디오 여행>만큼 오래되었다는 것은 안다. 비디오 가이드에는 신작 혹은 대여인기 순위인 영화들의 조그마한 섬네일과 함께 간략한 내용과 영화감독, 출연배우, 출시년도가 기입되어 있었다. 평론가들의 평가나 별점, 관람객 리뷰가 전무했으므로 끌리는 내용의 비디오를 고르는 것이 훨씬 쉬운 시대였다. 나는 비교적 잘 골랐다. 그것이 비디오 가이드를 펴낸 직원들의 노력이었음을 안 것은 어른이 된 후였다. 나는 가끔 비디오 가이드를 생각한다. 비디오 가이들 직원들은 지금쯤 은퇴 연금을 받으려나 같은......


  각설하고!


  나의 부모님은 자영업을 하셨다. 요즘에는 사양산업이다 못해 혹여나 발견하면 눈물까지 쏟을 정도로 반가운 '문구점'이었다. 우리 문구점은 꽤나 흥했다. 바로 옆 S문구점의 딸이 내 친구였지만 그 집 아버지도 우리 문구점의 인기를 인정할 정도였다. 하핫. 요즘은 한 길 건너 편의점이라지만, 그때는 문구점이 편의점과 같은 존재였으며 아이들의 사랑방 노릇을 하던 곳이었다. 등교하던 아이들은 문이 열리는 시간이면 참새처럼 (혹은 라스베이거스 메뚜기떼마냥) 문구점에 모여 들어 당장의 준비물이나 당시 유행하던 자그마한 레이싱카의 튜닝을 맡겼고 100원짜리 종이뽑기의 단골 상품인 석수를 외쳐댔고 노상에 즐비하던 문구점의 소유의 게임기(짱껨보 게임기)에도 자리잡고 앉아 주인아저씨를 소환하기 일쑤였다. 붐비는 시간은 대략 8시30분 이후였지만 부모님은 매일 새벽 6시면 기상해 자고 있는 나를 들쳐업고 문구점의 샷다(셔터)를 올려 장사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침을 흘리며 가게 안의 작은 창고에서 잠을 자다 일어나면, 그 당시 유행하던 월간 만화 '나나'를 보며 시간을 떼웠다. 바로 옆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으며 '언제쯤이면 나도 어른들처럼 입에 짜장 소스를 묻히지 않고 짜장면을 비울 수 있을까?' 같은 고민을 하던 청순한(?)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평일 생활이 거의 그랬다. 엄마가 들쳐업고 -> 졸린 눈을 비비며 국민학교 언니 오빠들의 광적인 소비 행태를 지켜보고 -> 월간 <나나> 혹은 해적판 무협 만화를 감상하고 -> 짜장면을 먹으며 어른을 꿈꾸고. 다행히 주말에는 조금 한가했다. 영업 준비는 아침 9시에 시작했고 저녁 8시면 마감했다. 가게의 큰 살림은 아빠가 보았고 주말이면 엄마는 5시즈음 일과를 마무리했다. 내가 7살이 되자 엄마는 신선한 제안을 했다.


  "바로 앞에 가게가 있으니까 주말에는 너 혼자 집에서 비디오 보면서 놀 수 있겠어?"


  집은 걸어서 3분 거리였고 글자를 일찍 깨우쳐 온갖 만화를 섭렵하고 지루하던 나는, 엄마의 제안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죄책감이 한가득한 엄마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시 아이답게 머뭇거렸다. 그리고 나는 곧 엄마에게 말했다.


  "응,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할게. 나 혼자 있을 수 있어. 대신 보고 싶은 비디오는 내가 정할래."  


  엄마는 웃었고 나는 남몰래 비디오 가이드에 표시해놓은 영상들의 제목을 고르기 위해 눈알을 굴렸다.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마도 내가 그만큼 비디오의 세계로 입문할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맞다. 나는 꽤나 성숙한 아이였던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내가 처음 자의에 의해 빌린 비디오는 톰 행크스가 출연한 '페니 마샬 감독의 빅(big, 1988)'이었다!!!



  

20대의 톰 행크스


아직도 선명히 떠오르는 발로 치는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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