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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Sep 09. 2019

영화광의 고백(7) - 이 영화를 꼭 봤으면 해

영화 좀 볼 줄 아는 아이


  어린 나에게는 몇 가지의 행운이 따랐는데, 그중 최고는 시기마다 취향을 나눌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 존재했다는 것. 그 시작점에 Y가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친해진 Y는 큰 키에 짧은 머리, 하얀 피부에 새침한 표정을 하고선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 종종 질투의 대상이 되는 아이였다. 작은 키에 활달한 성격, 남들 웃기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대부분의 시간을 깐족거리기 좋아했던 나는, 그 아이와 친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 우리는 같은 반이 되면서 소위 말하는 단짝이 되어 늘 붙어 다녔다.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무튼 그 아이와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영화였다. 그 아이도 나만큼 영화를 좋아했고 많이 보았다. 우리는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까먹으며 전날 본 고전영화들에 대해 나름의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한 번은 그 아이 부모님이 시골에 내려가신 날 그 집에서 1박을 했다. 마릴린 먼로의 <7년 만의 외출>을 보며 양파링을 먹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나는 목감기에 걸렸는데 Y는 감기약이 없다며 내게 가루로 된 용각산을 먹여주기도 했다. 그 아이는 당시 개인 컴퓨터를 소지한 유복한 가정의 외동딸이었다. 지지직 거리는 소음을 내뿜는 모뎀을 켜놓고 천리안인지 나우누리인지 하이텔인지에 들어가 채팅을 한 기억도 난다. 우리는 영화방에 들어가 서울 소재 명문대 신방과에 재학 중인 학생이라 뻥을 치며 깔깔 댔었다. 말도 안 되는 삐삐 번호를 남겨 혼란을 가중시킨 기억은 아직도 부끄럽게 남아 있다.


  나도 Y에게, Y도 나에게 자주 영화를 추천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니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아나?"

  "아니. 몰라. 과학자가?"

  "아니. 영화감독. 내 어제 그 사람 영화 봤거든."

  "아, 맞나? 재밌드나?"

  "재미? 이게 재미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무슨 소리고?"

  "나무! 영화에 나오는 아저씨가 죽은 나무에 계속 물을 주거든. 나무를 멀리서도 보여주고 가까이서도 보여주고 그런다."

  "뭐라카노. 나무만 나오면 다큐 아이가?"

  "나무 말고 사람들도 나온다."

  "사람들이 뭐하는데?"

  "얘기."

  "무슨 얘기?"

  "뭐 이런저런 얘기."

  대화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 Y는 내가 그 영화를 꼭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그 영화를 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거라면서. 그리고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그 영화의 나무와 마지막 장면이 계속 기억이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영화를 당장 보진 않았다. 죽은 나무에 물 주면서 희생을 외치는 영화라니 어쩐지 기괴한 느낌이 들었다. 


  그 영화는 바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한국에서의 흥행. 유럽에서 보다 더 인기가 많았단다. 칸느 4개 부문 동시 수상의 영향이었던 건가?


  Y는 안부인사처럼 말했다. "희생 봤나?" 나는 "아니. 볼 거다."라고 답했고 그런 날이 조금 더 이어졌다. 더 이상 희생을 미루는 것은 우정을 위해 안 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비디오 가게로 가서 "희생 있어요?"라고 물었다. 가게 주인은 나를 한 번 보더니, "희생 없다."라고 했다. 충격이었다. 도대체 그 영화에는 어떤 나무가 등장하길래 사람들은 아무 재미도 없어 보이는 그 영화를 보는 것인가. 나는 희생을 예약했다. 비디오가 반납되자 전화가 걸려왔고 부리나케 대여점으로 갔다. 그리고 Y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도 희생을 본다고. Y는 아, 맞나? 하고 말았다.


  희생은....... 관람하는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영화였다. 헐리우드식 해피엔딩과 오우삼의 홍콩 액션이 보여주는 명쾌한 영상 문법에 익숙했던 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알 수 없는 상징들에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나무. 정말 나무가 오래도록 나왔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즐겨 쓰는 롱테이크 기법은 어린 내게 공포감마저 주었는데, 나는 영화 이론에 문외한이었지만 카메라가 무언가를 지그시 오래도록 깊이 보여준다는 것은 그것이 상당히 중요한 장면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도무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물론 친구의 말대로 나무 이외에 사람들도 나왔다. 우편 배달부도 나왔고 죽은 나무에 물 주는 알렉산더(주인공)의 늦둥이 아들도 나왔고 다른 자식들과 부인과 친구들도 나왔고 하녀인 마리아도 나왔다. 그들은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마치 고전주의 시대의 명화 속 주인공들처럼 앉아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데, 제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내가 본 다른 영화들에서는 초반 이야기가 복잡해도 후반 클라이맥스가 등장하면 비밀이 밝혀지고 악인은 응징당하고 선인은 축복을 받고 그것도 아니면 모두가 멸망을 하던지 아무튼 가슴 한 구석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무언가가 등장했는데, 희생은 그렇지 않았다. 급기야 후반부에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주인공 알렉산더는 정신병원에 가게 되는데 실어증을 앓는 아들이 갑자기 말이 트이고 그 나무에 물을 주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영화를 봤으니 무언가를 말해야 할 텐데 나는 그 무엇도 알 수 없다.'



문제의 그 나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네가 인생을 알아?라고 묻는 듯한 삿대질.



  점심시간에 운동장 교정에 앉은 Y와 앉아 내가 먼저 말했다. "나무." Y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 이상 무슨 말을 더 나누지 않았다. 희생에 대해. 하지만 나무는 우리 둘 사이의 암호 같은 것이 되었다. 우리는 여럿이 어울려 있다가도 갑자기 "나무."하고 말했다. 그럼 다른 한쪽도 "나무."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럼 다른 아이들은 도대체 나무가 왜?라고 물었다. 그럼 우리는 희생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마도 우리는 희생을 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또래보다 더 큰 세상에 한 발 더 닿았다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정보 획득이 용이하지 않았던 시대이니만큼 남들과 다른 자기만의 취향이 곧 남다른 자아가 되었으니 말이다. 


  희생이 활로가 되어, 미국이나 중화권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영화들도 조금씩 찾아보기 시작했다. 비디오 가게 사장님들에게 추천을 부탁하기도 하고 비디오 가이드에 '예술'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으면 무조건 찾아보았다. 당시 교육 방송(EBS)에서 하던 영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거기엔 주말마다 영화평론가 유지나가 나와 영화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었고 나는 그것을 매주 챙겨보며 시야를 넓혀 갔다. 예술적인 다방면에 호기심을 가지고 잡지식을 키워나가며 나도 무럭무럭 성장했다. 나는 영화의 서브텍스트를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선호하는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촬영감독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을 이해하는 것은 삼각함수와 미적분을 이해하는 일만큼 어려웠다.(저 두 가지는 아직도 이해 못 함. 나의 수학적 지식은 방정식에서 끝이 났다.) <솔라리스> <거울> <이반의 어린 시절>과 같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인터넷의 발달로 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물이 향수(鄕愁)를 의미하며 불은 구원과 희생의 메타포임을 알게 되었고 희생 전반에 성서적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작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영화를 해석하려 하지 말고 그저 보고 느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루함을 견딜 수 없다면 자신의 영화를 볼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니, 이 얼마나 고집스럽고 오만한 예술가인가. 그럼에도 그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를 대라면, 그 무시무시할 정도로 관객의 인내를 시험하는 난해한 영상 속에 담긴 메시지 때문이리라. 희생뿐만이 아니라 그의 영화 전반 속에는 인간에 대한 고찰과 세계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에) 그의 영화는 늘 구원을 말한다. 그리고 그의 영화가 지루한 것은 그러한 메시지를 정말 아주 가까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렌지에 비유하자면 여타의 상업 영화가 오렌지의 단단한 껍질을 벗겨내며 그 속에 깃든 과육의 달콤함을 부각한다면, 그의 영화는 오렌지를 벗겨내고 과육을 절단하여 뭉쳐있는 알갱이를 뜯어내고 알갱이를 짓이겨 그것을 현미경에 올려놓은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인가? 이것 또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그것은 세계에 만연한 누추함과 비루함, 인간의 잔악성과 비극을 매우 민감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지구의 자전을 느끼는 것과 같다. 지구가 돌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어느 날 지구가 어제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는 꼴이랄까. 그 미세한 속도에도 지구는 기후 변화를 겪어 종말을 맞이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느끼는 사람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의 영화는 비명인데 다만 그는 조금 더 우아하고 묵직하게 비명을 지르는 것이라 보면 되겠다. 그러니까 이제 정말 이 모든 것을 함축해 말하면, 그는 누구보다 민감하게 비극의 전조를 느끼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는 평생을 영화라는 문법으로 외쳤다. 제발, 인간들이여, 이 암울한 종말의 기운에 세뇌되지 말고 깨어있자고, 깨어서 생각을 하자고 생각을 하고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삶의 키를 돌리자고, 그리고 그 키를 돌리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이제껏 살며 든 힘보다 더 들 수도 있고 우리가 보낸 삶보다 더 오래 걸릴 수 있으니 단단히 각오를 하자고, 이 땅의 살아있는 생명들을 위해서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 조금 더 나은 우리가 되자고. 그리하여 그는 희생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토록 무서운 재난을 만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정상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그것이 미치광이처럼 보일 것이다. 아니, 저 인간은 왜 저런데? 알렉산더가 정신병원에 가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며 그리하여 부조리하다. 그는 사실 매우 매우 민감하며 인류의 평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했을 뿐이니까. 다만 범인들인 우리들은 그것을 알 수 없으니. 여담인데 얼마 전 희생을 다시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타르코프스키는 칸트와 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고. 원칙주의자에 금욕주의자이며 순수이성비판을 써 모두를 혼란에 빠뜨린 칸트도 철학을 통해 말하려 한 것은 결국 우리 모두 물질적인 것에만 경도되지 말고 제대로 된 정신으로 조금 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평화롭게 살자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그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지루함과 난해함을 거쳐야 하고 그 과정을 다 거치고 나서도 자신이 이해한 게 맞는지 계속 확인해야 한다. 엄청 피곤해져서 냉담해진다는 점에서도 왠지 비슷-.-;)


  사실 희생이라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오늘 안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감독은 해석하는 것이 바보짓이라고 했지만 도대체 그 영화를 해석하지 않는 일이 가능할까 싶다. 방탄소년단의 음악을 들으며 어깨춤을 참는 일과 비슷하다 볼 수 있다. 


  아, Y! 나에게 감당할 수 없는 난해한 영화를 추천한 급식 시절 단짝이여. 사실 Y는 희생 이외에도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화집을 빌려주기도 했고 주주클럽의 열여덟 스물을 알려 준 친구이기도 하다. Y와 나는 족히 10센티 넘는 키 차이에 외관상 균형은 좀 안 맞았지만 마음은 찰떡처럼 맞아서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서로 다른 중학교를 진학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지만 나는 아직도 12살 시절 Y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한다. 더불어 Y는 나에게 팝 음악의 심오한 세계에 눈을 뜨게 해 준 친구, K를 소개해 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도 이래저래 고마운 마음이 든다. 이제 서른이 훌쩍 넘은 Y도 어딘가에서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겠지. 어떤 모습이 되어있든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 영화를 꼭 보길 바란다던 너의 투정은 정말이지 옳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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