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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Oct 11. 2019

영화광의 고백(9) - 언니들의 세상

클루리스 정도는 봐줘야 힙스터


  중학교 3학년. 새학기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연례행사가 있었으니 교실 뒤편에 본인이 직접 장식한 자기소개 판넬을 붙이는 것이었다. 나는 음악과 영화와 책을 두루 좋아하는 아이였고 그것을 어떻게든 발산하기 위해 형광 오렌지 보드 위에 까만 네임펜으로 나의 최애 목록을 적었다. 음악 부분에서는 스파이스 걸스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브리트니 승! 책은 아마도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썼을 것이다. 영화배우는 '레밍턴 스틸'을 통해 완전히 빠져서 007을 통해 확고한 나의 꽃중년으로 등극한 '피어스 브로스넌'이었다.(그리고 나는 피어스 브로넌스라고 써버렸다.)

  

  아이들의 자기소개를 구경하고 있던 내게 누군가 어깨를 톡톡 쳤다. 짧은 단발에 하얗고 마른 몸을 가진 아이. 그 아이는 종달새 같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너 브릿니 좋아하니? 난 크리스티나 아귈뤠라 좋아해." 찰진 발음을 가진 아이, 그 아이는 거의 원어민 수준의 발음으로 가수들의 이름을 불렀다. H와 나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H는 영어로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능숙하지 않은 회화실력 때문에 우리는 쉬는 시간이면 영어 교과서를 펼쳐 놓고 영어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덕분에 영어 수행평가에서 우리 둘이 조를 짰고 선생님은 "너네 외국 살다 왔니?"라는 질문을 던지셨다. 나도 그 아이 덕분에 영어를 좋아하게 되었다. H는 독특했다. 그 나이 때 아이답지 않게 쿨했다. 그야말로 "So what?"과 "Do whatever you like."가 가능한 아이였다. 그 아이는 가끔 혼자서 중국 무협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아직도 그 아이가 정이건의 <결전>이었나 <촉산전>이었나를 보고 와서 내 앞에서 중국 무협 영화 특유의 검술 동작을 보여준 기억이 생생하다. 그 아이와 나는 당시 유행하는 팝음악의 가사를 외워 따라 부르는 것을 즐겼다. 그 아이 덕분에 외운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lucky' 가사를 나는 아직도 잊지 않는다. 


  아무튼 우리는 영화 보는 취향도 비슷했는데 어느 날 그 아이가 클루리스를 보았냐고 물었다. 나의 대답은 "Absofuckinglutely!" 영화 좀 본다 하는 아이들이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와 양대산맥을 이루던 90년대 하이틴 영화의 바이블 <클루리스>를 보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알리시아 실버스톤은 당시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여자 중 하나였다.


맨 왼쪽에 폴 러드, 69년 생인데 도무지 나이를 안 먹는 것 같다. 미국 토크쇼에서도 우스갯소리로 폴 러드는 나이 안 먹는 유전자를 지닌 외계인이라고 부르기도.


  내용은 간단하다. 부잣집 딸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인기몰이를 하는 여왕벌 셰어(알리시아 실버스톤)가 있다. 그녀는 아침마다 컴퓨터의 코디 프로그램을 통해 옷을 갖춰 입고 학교로 간다. 절친인 디온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금수저에 패션을 좋아한다. 그들이 복도를 지나가면 홍해처럼 갈라지는 아이들. 어느 날 타이(브리트니 머피)라는 일명 '시골 촌뜨기' 같은 아이가 전학을 오고 셰어는 패피다운 사명감에 불 타 그 아이를 세련되게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툭하면 자신의 미인계를 이용하고 돈이면 다 해결되는 줄 아는 셰어에겐 조시(폴 러드)라는 대학교 1학년의 이복오빠가 있다. 오빠는 책만 읽고 고리타분하다. 그녀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하면 셰어는 특유의 눈 까뒤집기를 시전하며 무시를 한다. 그러던 중 자신의 수하로 생각했던 타이와 충돌하고 소소한 계략을 벌이다 실패를 맛보며, 세상이 자신의 통제하에 있다는 착각을 버리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친구 디온과 그녀의 남자 친구가 보여주는 진실한 사랑, 이복오빠 조시와의 에피소드를 통해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내용이다.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이 모두 등장하는데 교훈적인 결말까지 보여줘 아직도 하이틴 영화를 논할 때 종종 언급되기도 한다. 나도 이 영화를 무진장 보았고 H도 그랬다. 사대주의를 가진 아이들은 아니었지만, 규율과 통제라는 갑갑한 한국 교육 시스템에 갇혀 있던 우리에게, 영화가 보여주는 자유분방한 학교의 분위기는 유토피아처럼 느껴졌다. 클루리스엔 우리가 빼앗고 싶은 언니들의 세계가 있었다. 아마 당시 그 영화를 즐겨 본 많은 10대들이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특히 H는 얌전한 얼굴로 에미넴의 무지막지한 랩을 읊조리며 외국살이에 대한 열망을 키웠고 실제로 그것을 실현했다. H는 하이틴 영화 속 남자 주인공 같은 외모를 가진 연하의 캐나다인 남편과 유럽에서 크로와상을 뜯으며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다. 자신이 바라는 바를 제대로 실현한 멋진 여자가 되었다. 나는 클루리스를 필두로 수많은 하이틴 영화를 섭렵하며 깨달은 것이 있으니 바로 너드에게 끌린다는 점이었다. 클루리스를 보면서도 셰어가 왜 조시를 무시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마지막에 둘이 키스를 하는 장면에서 좀 뜨악하긴 했다. 물론 이복형제이고 부모님이 또 이혼을 해버렸기 때문에 완전한 남남이 되었지만 그래도 한때 같은 지붕 아래에서 법적인 남매로 살았는데 어떻게 키스가 가능한 것인가. 아, 저것이 미국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지금이 더 어려 보이는 폴 러드. 친근했던 그의 이미지가 앤트맨으로 완전 떠버려서 너무 고급지게 변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영화 속 너드들에게 반하며 결국 내가 완전 추구하던 손이 예쁘고 피부가 하얗고 합리적 선택이 가능한 너드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니 나도 로맨스적 로망을 실현했다 볼 수 있겠다.


  H와 나는 싸움 한 번 없이 햇수로 19년의 시간을 여전히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리고 에미넴과 브리트니, 장국영과 임청하, 클루리스와 게리 올드만(H가 10대 때 게리 올드만을 제일 잘 생긴 배우로 꼽았다!)을 볼 때면 어김없이 H의 생각을 한다. 우리는 비록 각자의 삶을 살며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아직도 여전히 클루리스를 이야기한다. "클루리스 너무 좋아!" 우리가 19년 동안 이 말을 몇 번이나 했던가? H에게 뒤늦은 생일선물을 보낸 뒤, 다시 한번 이 영화를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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