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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Oct 15. 2019

영화광의 고백(10) - 누군가의 영향 아래

우리는 타인의 삶 앞에서 왜 졸았던가?


  나는 그 아이와 어떻게 친해졌는지 생각해보려 해도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그 아이의 지적인 수다에 탄복한 기억은 난다. E! 그녀는 정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친구였다.


  그녀는 툭 치기만 해도 술술술 지식이 쏟아지는 보물상자 같은 아이였다. 다른 말로 지식의 화수분이라 할 수 있겠다. E는 그림도 어찌나 잘 그리는지 당시 우리 학교 만화동아리 일원이었다. 또한 오타쿠적 기질이 다분했고 학교에서 언제나 잠만 잤지만 공부는 썩 잘했다. 수포자였던 나는 그녀에게 수학 공부를 배우기도 했었다. 열의에 찬 나의 태도에 만족스러워했지만 바닥을 뚫어버린 나의 수학 성적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언사외 전형이 있잖아,라고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시니컬한 말투와 눈빛을 장착했지만, 내가 책상에 철퍼덕 엎어져 있으면 따뜻하게 등도 두드려주고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만든 열쇠고리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정말 좋은 아이였다. 당시 그녀의 소원은 이탈리아로 직접 가 자신이 응원하는 구단의 축구 시합을 보는 것이었다. 아마 그녀는 2002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응원한 것으로 기억한다. 공항으로 가 그들을 마중하고 싶어 안달 난 기억이 난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문화적으로 그녀의 영향 아래 있었다. 문학이면 문학, 영화면 영화, 만화면 만화. 정말 모르는 것이 없었다. (나는 교련 수업 마지막 세대) 교련 수업이 진행되던 어느 날, 그녀는 선생님보다 더 핵무기에 대해 잘 설명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날카롭게 스치던 밀덕의 면모 또한 잊을 수 없다.


  방학이 다가오며 해이해진 교실의 분위기. 선생님 재량으로 우리는 가끔 수업 시간에 비디오를 감상할 수 있었다. 그녀의 강력한 추천으로 우리 반 아이들은 한 편의 영화를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삶>!!!


포스터가 왠지 아쉽다. 무언가 심심한 느낌. 이 영화가 얼마나 명작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상냥한 얼굴과 다르게 그렇지 못한 태도



  줄거리는 이렇다!

  1984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 한국과 마찬가지로 분단 상태였던 독일. 동독은 비밀경찰을 두고 국민들의 삶을 감시했다. 비밀경찰의 숫자만 10만이 넘었다고 한다. 그중 냉혈한으로 불리며 누구보다 차가운 비밀경찰이었던 비즐러에게 임무가 떨어진다.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애인인 여배우 크리스타를 감시하라는 명령이었다. 체포할 수 있는 단서를 찾기 위해 비즐러는 그들의 삶을 감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비즐러는 그들의 삶에 감화되어 급기야 눈물까지 흘리게 된다. 그들의 삶을 지켜보며 예술의 위대한 힘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점점 인간적 면모를 갖추게 된다는 이야기.


  비디오가 시작하고 조용하던 분위기가 바뀐 것은 30분 정도가 지나서였다. 슈퍼히어로 영화였다면 화장실마저 참으며 비디오를 감상했을 아이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소곤소곤 떠들어 댔다. 몇몇은 아예 엎어져서 잤다. 그중에 나도 있었다.......


  나는 E가 이 영화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당시 E는 나에게 이 영화와 함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볼 것을 강권하다시피 했다. 이 영화와 그 책을 꼭 보라고. 그것을 보면 삶이 바뀐다고. 책을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나였지만 그땐 왜 그랬는지 그녀의 추천에 대충 대꾸했다. 비디오가 상영되는 내내 아이들은 더욱 번잡해지기 시작했다. 영화는 별다른 액션 없이 묵묵히 타인의 삶을 비추고 있었다. 나중에 E는 노골적인 실망감을 내게 토로했다. 자기가 추천한 영화에 아이들이 무심해서라기 보다는 이렇게 좋은 영화를 두고도 보지 않는다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나도 신나게 졸았던 입장으로 뭐라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스물두 살에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었고 서른이 되었을 때 <타인의 삶>을 보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E가 왜 그토록 내게 이 영화를 추천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엄청나게 울어버렸다.


  모르면 몰랐지 알면 멈출 수 없다는 점. 그것은 예술도 마찬가지고 타인의 고통도 마찬가지였다. 비즐러는 단순히 예술에 심취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들의 인생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고통에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는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했고 그에 묵묵히 따랐다. 그것은 신념이기도 했고 주어진 삶이기도 했으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언제나 헤드셋을 머리에 끼고 국가의 안위를 위해 타인의 삶을 염탐하는 자. 그가 드라이만과 크리스티나를 알기 전까지 그는 흑백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오로지 감시와 처벌만이 가득한 세상. 하지만 그가 영화 마지막에 드라이만이 쓴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라는 책을 사며 포장하겠냐는 점원의 물음에 "아니요, 내가 읽을 거예요(It's for me)."라고 말하는 장면은....... 아, 뭐랄까 이토록 무미건조하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의 심금을 울렸다.


  E의 말은 절반 정도 맞았다. 그 영화는 내 삶을 바꾸어 놓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예술이 인류사에 가지는 의의와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한 이후였으니까. 하지만 그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더욱 단단해졌다. 가치 있는 것을 행하는 일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가에 대한 신념을 굳힐 수 있었다는 말이다. 당장의 성과와 사람들의 열광 진실에 눈감지만 평온한 삶. 하루에도 열두 번 흔들리는 마음은 재능에 대한 의문보다 가치 있는 무언가를 추구하는 일을 어리석게 만드는 이 세상이었고 그런 세상에 마음을 자꾸만 뺏기는 나였다. 사람은 아무리 바뀌지 않아도 영혼은 흔들 수 있다. 그것은 이 세상 어떤 흔들림보다 가치 있다. 나는 그 영화를 보며 흔들리는 내 영혼을 발견할 수 있었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기분 좋은 흔들림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나는 연락이 끊겼던 E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의 친구를 에둘러 얻은 연락처. E는 내 기억 속의 모습과 달랐다. 조금은 타성에 젖고 조금은 권태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E와 어색한 안부를 나누며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음에 행복했다. "나도 타인의 을 봤어. 정말 좋은 영화더라." 늦게라도 말해 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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