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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Oct 18. 2019

영화광의 고백(11) -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행운

그녀에겐 잔뜩 화난 1인치, 우리에겐 1인치 넓어진 세계


  고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은 국어 과목을 가르치셨다. 단발머리에 군인 같은 말투를 가진 여자 선생님. 엄격한 어조와 달리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은 분이셨다. 밀려드는 행정업무와 교과목 지도에 정신이 없는 터라 하나하나 다정하게 대해 주신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조금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신경 써 주신 분이다.


  나는 유달리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그런 선생님들의 책상은 일단 개방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 목적도 없이 교무실에 가서 수다를 떨 수 있는 그런 타입. 중3 때 선생님은 지금 나와 같은 나이였는데, 나와 내 단짝이 방과 후 교무실에 가 재잘거리면 처리할 서류를 앞에 쌓아두고도 일단 우리의 고민을 들어주시던 분이었다. 아직도 생각난다. 뿔테 안경을 끼고 난감하게 웃으시던 그 얼굴. 쌤, 잘 계신가요?


  아무튼 고2 때 담임 선생님은 직접 교장 선생님에게 허락을 받아 우리 반 전원을 데리고 대학로에 가서 뮤지컬을 보여 주시기도 했다. <지하철 1호선> 내가 처음으로 본 정식 뮤지컬이었다. 말로만 듣던 전설의 학전 극장 앞에서 교복을 입고 오들 거리던 우리. 나는 뮤지컬을 관람하고 뛰는 가슴을 멈출 수 없었다. "너희들이 보는 게 세상의 전부가 아니야. 이 공연이 너희들에게 좋은 시간을 만들어 주었길 바란다." 까만 밤 지하철역 앞에서 선생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방학을 앞둔 어느 날, 선생님은 정말 좋은 영화를 한 편 보았다면 우리들에게도 소개해 주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선생님 담당인 국어 시간에 우리는 그 영화를 보았다. 바로 <헤드윅>이었다.



  익히 영화의 명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존 카메론 미첼과 스티븐 트래스크라는 젊고 진보적인 예술가 둘이 합심해 제작한 뮤지컬. 뉴욕을 충격에 빠뜨린 그 뮤지컬을 영화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영화 매거진을 장식하고 있었다. 데이빗 보위와 마돈나도 보았다는 그 뮤지컬을 선생님은 우리에게도 보여주셨다.


  트랜스젠더에 대해서라면 알고 있었다. 정말 단순히 알고 있었다는 정도가 되겠다. 게다가 당시 여자보다 더 이쁜 여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등장한 '하리수'의 등장으로 미지의 존재로만 알고 있던 트랜스젠더는 어느 정도 대중에게 익숙해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것은 그저 그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뿐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고민을 하는지에 대한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 때였다.


  


  


  어린 시절, 학대와 상처로 물든 시간을 미군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록음악으로 달래는 소년 한셀. 그는 동독에 살고 있다. 어느 날 미군 병사 루터가 그에게 여자가 되는 조건으로 결혼을 제안한다. 한셀은 자기 엄마의 이름을 따 '헤드윅'이라 이름 바꾸고 성전환 수술을 한다. 그러나 야매 수술로 인한 실패는 1인치의 살덩어리로 그에게 남는다. 루터가 떠나고 미국에서 토미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토미는 헤드윅의 노래를 훔쳐 달아나고 록스타가 되어버린다. 원한을 가득 품고 헤드윅은 '앵그리인치'라는 밴드를 조직해 토미의 투어를 따라다니며 근처 바 같은 곳에서 공연한다. 


  많은 사람들이 보았고 뮤지컬로도 여전히 승승장구하는 영화이기에 굳이 줄거리를 상세하게 쓰진 않겠지만, 혹시 못 본 사람들도 있을 테니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 영화의 줄거리를 백 번 설명한들 이 영화가 내게 준 충격은 설명할 수 없을 테니.


  이 영화를 보았다고 내가 소수자의 세계를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적어도 모르기 때문에 지나치고 갔던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극 중에 등장하는 한셀의 이야기도 여자가 된 헤드윅의 이야기도 보편적 관념들에서는 쉬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셀과 헤드윅이 느꼈을 상처와 공허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슬픔이었다. 나도 헤드윅만큼이나 토미가 미웠다. 하지만 'Wicked Little Town'의 가사처럼 차가운 도시 속에서 운명이 아무리 나를 시험에 들게 해도 힘들어하지 말고 헤쳐나가길, 헤드윅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편견 속에 갇혀 허우적거린다고 해도 그녀 자신만은 자신을 영원히 사랑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영화를 다 보고 나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영화 자체가 가진 독특함과 이야기의 힘을 곱씹어 보며 혼자만의 리뷰를 쓰기도 했고, 내 안에 1인치 정도 더 열린 세계의 틈을 조용히 바라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선생님은 우리가 더 넓은 세계를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살가운 태도로 10대의 용어를 쓰는 쿨한 선생님은 아니셨지만 선생님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본 좋은 것들을 함께 나누는 것만큼 사랑을 말할 수 있는 행위가 더 있던가. 


  졸업 이후 딱 한 번 선생님을 더 뵀다. 수업을 하다 말고 나오셔서 친구와 나를 반갑게 맞아주신 K선생님. 이후 들린 소문에 선생님은 더 이상 선생님이 아니셨다고 했다. 휴직이 아니라 사직이었던 것 같다. 방학이면 커다란 배낭을 메고 유럽 곳곳을 누비던 선생님, 나중에 결혼해서 남편과 여행을 가더라도 꼭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게 좋다고 권유해 주시던 생각이 '힙'하셨던 고2 담임 선생님을 나는 잊지 못한다. 선생님이 간간이 들려주셨던 여행담과 영화와 음악들. 비록 질풍노도의 10대들은 끊임없이 권위와 마찰하며 때론 긴장의 순간을 만들기도 했지만. 훌쩍 커버렸음에도,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지하철 1호선>과 <헤드윅>이라는 귀한 선물을 나는 여전히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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