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존치즈버거 Oct 25. 2019

영화광의 고백(13) -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니로


  나는 공상이 많고 바깥에 나가기보다는 정신적인 모험을 즐기는 타입의 아이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책과 영화를 통해 한껏 정신의 포만감을 느꼈다. 그 포만감은 오히려 현실에서 나를 해야 할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잘 구분하는 아이로 만들어 주었다. 특히 나는 미국으로 이주한 남미나 이탈리아 사람들이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기 위해 가족적으로 총을 들고 식당을 차렸지만 사실은 주방에서 온갖 약물을 만들어 팔며 배신과 복수를 펼치는 누아르 영화를 좋아했다. 그런 영화를 보며 폭력이 주는 자극적인 쾌감을 느끼는 동시에 피투성이 시체들이 던지는, 이를테면 인생 똑바로 살라는 경고에 홀로 숙연한 자세를 취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들의 삶이 내가 전혀 가닿을 수 없는 영역이기에 호기심을 가지고 누아르라는 세계에 빠진 것이 아닌가 싶다. 궁금하지만 위험한 그 세계를 영화로 볼 수 있다는 즐거움에 얼마나 행복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70-90년대 누아르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던 배우들 중 내가 단연코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니로였다. 연기를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두 배우는 롤모델이라는 말도 짜증 날 정도로 연기의 왕좌에 올라 가 있는 배우들 일 것이다. 나 또한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니로의 이름을 들으면 영화 내용을 몰라도 일단 비디오를 집어 드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마치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듯이.


  특히 <대부> 시리즈는 나를 충만한 만족감으로 적셔 주었는데, 전설적인 두 배우의 연기를 한 화면 안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함을 느꼈다. 물론 둘은 한 번도 만나지 않지만.


마피아와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 것 같던, 마이클 콜리오네도 결국 누구보다 냉혈한 보스가 된다.


대부 1에서 말론 브란도가 맡았던 비토 콜리오네의 젊은 시절을 연기한 로버트 드니로. 드니로는 대부 2에만 등장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알 파치노를 더 선호한다. 선호한다기보다는 거의 푹 빠졌다. 그의 젊은 시절이 고스란히 담긴 대부를 보며 그에게 빠지지 않을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 얌전한 대학생으로 마피아로 대성한 자신의 집안을 부끄러워하는 듯 냉소적이던 마이클 콜리오네. 아버지를 바라보는 그 우수에 찬 눈빛과 삶은 달걀을 까놓은 듯 반질거리는 피부와 아름다운 턱선. 마이클을 연기하는 알 파치노를 보며 그가 왜소한 몸집을 가졌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사람에게 아우라라는 것이 있구나. 감탄에 또 감탄을 했다. 그렇다고 로버트 드니로가 별로라는 말은 아니다. 로버트 드니로는 정말 예리한 칼날 같은 느낌을 준다. 택시 드라이버에서 보여 준 광기 어린 연기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다만 나를 울리고 마는 것은 알 파치노다. 이상하게 알 파치노의 연기를 보면 눈물이 난다. 페이소스라는 단어가 사람이 되어 살아 움직이면 알 파치노가 아닐까. 로버트 드니로의 연기를 보면서는 늘 신뢰와 탄복을 느끼지만, 알 파치노가 연기한 인물에서는 사랑과 연민 그리고 치욕까지도 느껴진다. 아마도 이것은 순전히 취향의 차이일 것이다. 둘은 모두 엄청나게 훌륭하고 또 훌륭한 배우다.(물론 로버트 드니로가 성접대를 받으며 10대 소녀와 관계한 탓에 유럽 어느 나라를 방문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듣고 그가 인간적으로 싫어진 것은 인정.)


  아무튼, 누아르라면 일단 봐야 직성이 풀렸던 나는, 어린 시절을 무분별한 총질과 백색공포라 불리는 코카인이 범벅된 화면을 보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런 거 많이 보면 애가 삐뚤어질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것은 오산이라 말하겠다. 약을 할 놈들은 그런 영화를 안 봐도 한다. 오히려 나처럼 누아르 무비를 통해 정신의 모험을 거듭한 아이들은, 코카인으로 벌어들인 돈이 결국은 그들의 망가진 뇌를 고치는 병원비로 다 들어간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되려 실생활에서는 그 누구보다 공명과 정대 그리고 정직을 우선으로 하였다. 사실 저런 영화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병원이라도 가서 고치면 다행이지, 대부분은 상대편 총에 맞아 죽거나 가족에게 뒤통수 맞거나 그도 아니면 자기도 마약을 하다 코에 구멍이 뚫리고 혈관이 터져서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음은 아쉽게도 영면보다는 '뒤진다' 쪽에 가깝다. 


  

<스카페이스1984>  오금 저리게 만드는 악당 토니 몬타나. 쿠바 이민자 연기를 탁월하게 했다. 악센트며 미치광이 총질이며 코카인에 중독된 연기는 예술 그 자체!


<도니 브래스코1997> 마피아 중간 보스로 열연했다. 이 영화 보면서 안 울면 인간도 아니다,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칼리토1993> 마피아들의 이야기는 결국 이민자들의 아메리칸드림에 관한 것이다. 칼리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름! 


<좋은 친구들1990> 로버트 드니로의 영화 중 제일 좋아하는 작품. 마초쌈밥에 마초쌈장을 바르다. 돈 앞에 장사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히트1995> 알 파치노와 드니로의 조우! 두 사람이 카페에 마주 앉았을 때 튀기던 불꽃이 화면 밖으로 뚫고 내 가슴에 명중했다!!!


  사실 두 사람은 남자 배우 중 연기 예술의 최고봉을 지키고 있던 만큼 라이벌로 자주 언론에 소환되었다. 그것을 의식한 것인지 둘은 거의 같은 작품을 찍지 않았고 나와도 붙는 신은 없었다. <히트>에서도 정말 잠깐 카페에서 마주 보는 것 말고는 같은 프레임 안에 있는 적이 없다. 그래도 최근 토크쇼를 보면 둘이 나오기도 한다. 뭔가 굉장한 기싸움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단순히 연기만으로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는 히트를 보기 위해 10년을 기다렸다. 여러 가지 꼼수로 청불 비디오를 빌려 왔던 나지만, <히트>의 장벽은 높았다. 나는 10년이 지나 성인이 되어 이 비디오를 빌릴 수 있었다. 그때의 감격은 속된 말로 '오지고 지리고'를 능가했다. 170분이라는 기나긴 러닝타임을 단 한 번의 빨리 감기도 없이 황홀경을 느끼며 탄성을 내질렀다. 발 킬머도 유능한 배우였지만, 저 대배우 사이에서 엄청 긴장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마초들이 대거 나와 성공을 위해 내공 만점의 허세를 시전 하며 여자를 도구화 혹은 대상화하고 타인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생명을 경시한 채 놀이처럼 살인을 해대며 마약이 무슨 영양제라도 되는 듯 밥보다 더 많이 섭취(?)하는 영화들을 보며 성장했지만, 나는 이렇게 잘 자랐다.(사람들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내 생각에 이런 극악무도한 타락을 예방주사처럼 비디오로 미리 맞은 덕택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런 비디오만 봤으면 또 저런 세계를 동경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내 방에는 훌륭한 정서의 자양분이 되어준 양서들도 많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건 진짜 다행인 듯싶다. 어쨌거나 영화라는 수단으로 뒷골목을 주름잡던 저 두 배우도 이제는 깊은 주름을 가진 노년의 배우가 되었다. 그들은 가끔 아주 별로인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들의 영화를 보며 감탄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의 외모만큼 그들이 연기하는 인물들도 부쩍 노년의 고독이나 허무함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들의 형형한 눈빛에서 드러나는 위엄은 그대로이다. 부디 별 탈없이 생의 끝자락까지 연기를 멈추지 않기를! 나 또한 그들과 함께 나이를 먹으며 그들의 젊은 시절을 한없이 기억할 테니.


  

이전 12화 영화광의 고백(12)-여자 둘이 봉만대 감독 영화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