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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Oct 28. 2019

영화광의 고백(14) - 이름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내 생애, 단 한 명의 배우와 대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화를 보며 인생을 배운 내게 배우란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펼 수 있게 도와주는, 제일 처음 만나는 안내자들이었다. 나는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신다는 크리스마스보다도, 크리스마스 특수를 겨냥해서 쏟아지는 신작 비디오에 더 마음이 설레던 아이였다. 특히 맹꽁이 시절에는 영화 속 인물과 배우 사이의 간극을 알지 못했고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아 사생활을 잘 알 수도 없었기에 오롯이 그들의 연기만으로 그들에 대해 정의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좋아하던 어떤 배우들이 자신들의 인생에서는 약쟁이거나 극악무도한 가정폭력범이거나 희대의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충격과 공포에 빠졌었다. 그중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오랜 시간 동안 어린 소년들을 성폭행해서 자신이 쌓은 모든 명예와 부를 공기 중에 증발시키고 있는 케빈 스페이시인데, 내가 그의 영화와 그의 연극과 그의 연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른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그의 재판 생중계를 보며 정말이지 비참한 기분을 느꼈다. 그 위풍당당하던 배우가 초라한 꼬락서니를 하고서는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절로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었다. 추악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인간의 말로를 생생하게 확인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실제로도 좋은 사람임을 확인하는 순간 말할 수 없이 깊은 만족을 느낀다. 톰 행크스, 스티브 카렐, 티나 페이, 마야 루돌프, 케이트 블란쳇이 그렇다. 물론 탁월한 연기 실력답게 인터뷰도 꾸며내면 된다지만, 이들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인간적인 신뢰를 주는 일관적인 인터뷰 태도와 삶의 가치관, 시의적절한 농담을 던지면서도 상대방의 인격을 해치지 않는 배려심, 자신들이 쌓은 부와 명예를 누군가 예찬할 때면 부러 자신을 낮춰 주변을 웃음 짓게 만드는 겸손함 같은 것들. 좋은 사람이 좋은 배우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볼 때면 좋은 배우가 좋은 사람일 때 선사하는 안도감과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각설하고!

  내 영혼을 섬세하게 터치해주던 수많은 배우들 중 내가 단연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픈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메릴 스트립이다. 메릴 스트립이 나오는 영화를 볼 때, 연출이나 각본이 후지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어도 그녀의 연기가 별로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리고 별 한 개도 아까운 멍청한 영화라도 메릴 스트립이 등장하면 온전히 그녀의 연기력으로 별 3개쯤은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다, 이건 생각이 아니다. 단연코 확신한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 어린 나는, 자연스럽게 어린 빌리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밖에 없었고 영화 말미에는 눈물 콧물 다 뺐다.


  메릴 스트립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라는 영화를 통해서였다. 이혼을 앞두고 잔뜩 날이 선 엄마와 아빠. 아들인 빌리는 그 사이에 껴 부모가 쏟아내는 울분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부모는 그를 엄청나게 사랑한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빌리에게 온전히 신경 써 줄 수 없다. 그래서 빌리는 다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사랑과 전쟁을 방불케 하는 빤한 이혼 스토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만 아쉬운 것은 메릴 스트립이 후에 더스틴 호프만에 대해서 말할 때였다. 감독과 더스틴 호프만이 짜고 각본에도 없는 불맛 싸대기를 메릴 스트립에게 날렸다고 한다. 자기들 말로는 날 것의 반응을 이끌어 내고 싶었다지만 정작 뺨을 맞은 메릴 스트립은 너무나 당혹스럽고 화가 났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헐리우드나 한국이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소피의 선택 1982> 다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크나큰 고통을 주는 명작. 전쟁은 정말 나쁜 것!


  사실 나는 메릴 스트립을 떠올리면 <소피의 선택>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그럼에도 나는 딱 한 번 이 작품을 본 이후로 다시는 보지 않았다. 볼 수 없다고 부르는 것이 맞겠다. 도저히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 어여쁜 딸을, 아우슈비츠에서, 그것도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나치에게 빼앗기는 슬픔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더 잔혹한 것은 그뿐이 아니다. 장교는 소피에게 아들과 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둘 중 하나는 가스실로 가야만 하는 것이다. 정말 욕도 부족하다. 어떻게 엄마에게 자기 아이 생명을 두고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인지. 소피는 어쩔 수 없이 딸을 선택했지만 딸마저 그녀와 떨어진다. 소피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장교를 유혹하고 인간적인 치욕을 맛보지만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자살 시도도 해보았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독일이 패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소피가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까 싶지만 어떻게든 삶은 이어가고 전쟁의 상처로 망가진 두 남자를 만나게 된다. 너무너무너무 슬프고 아프고 보는 내내 힘든 영화였다. 하지만 이 영화로 메릴 스트립은 그 해 유력 영화제의 모든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단 한 번 보았음에도 영화의 장면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1985> 정말 명장면! 나도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 남편이 머리를 감겨주었는데 이 영화가 떠올라서 혼자 쿡쿡 웃었던 기억이 난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1995> 극 중 자식 입장에서 엄마가 떠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평생 자기 갈망을 숨긴 채 살아야 했을 엄마의 공허를 동시에 느꼈던 영화.



<어바웃 리키 2015> 메릴 스트립에게 안 어울리는 배역은 없다! 가정 내팽개치고 자기 꿈만 찾는 엄마 역할도 찰떡 같이 소화했다. 친딸 마미 검머와 함께 출연!



  무수한 명작들 사이 메릴 스트립의 최고작을 고르라면 그것은 당연히 '가장 최근작'이다. 그만큼 메릴 스트립의 연기에는 낡은 기운이랄 게 없다. 예전 작품은 예전 작품대로 최신작은 최신작대로 보는 재미가 있다. 허투루 소화하는 역할이 없다. 배역마다 악센트도 다르고 서 있는 자세나 걸음걸이도 다르다. 이것은 단순히 재능의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노력과 분석이 이러한 명연기를 탄생하게 만들었는지 실감하게 할 정도다. 실제로 많은 배우들이 메릴 스트립과 연기를 앞두고 긴장을 한다고 한다. 많은 배우들이 그녀와 작업하고 그녀로 인해 깨달음을 얻은 일을 마치 간증이라도 하듯 토크쇼에서 말한다. 그리고 늘 하는 말은 "그녀는 정말 좋은 배우이자, 좋은 사람입니다."이다. 실제로 그녀는 스캔들이 없다. 젊은 시절 사랑하는 약혼자이자 명배우였던 존 커제일을 암으로 잃기 전 그녀가 그를 3년이 넘는 시간 지극정성으로 간호한 일화는 유명하다. 현재 남편과 그 이후에 만나 한 번의 파경설도 없이 현재까지 아이들도 잘 키우며 오순도순 살고 있다. 그녀의 딸인 마미 검머도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로 알려져 있다. 


  사실 메릴 스트립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그녀는 거만해도 좋을 배우다. 아마 사람들도 그녀의 거만함을 용인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장난을 칠 때나 우쭐한 듯 어깨를 으쓱하지 진지한 상황에서 자신이 가진 재능과 부와 명예를 떠들어 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사생활에 대한 별스러운 기사가 나지 않는 것도 그만큼 철저한 자기 관리와 함께 '정말 아무런 일 없이 평온하게' 삶을 유지하는 그녀의 태도가 한몫을 한 것 같다. 물론 하비 와인스타인이나 로만 폴란스키를 두고 한 말 때문에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나는 아주 예전부터 그녀가 여배우로서 그리고 여자로서 자신이 당한 불평등과 편견에 대해 당당히 맞선 것을 알고 있기에 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녀의 논란을 대하는 편이다. 그녀는 자신이 한 실수를 반드시 사과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어쨌거나 그녀는 나에게 언어가 달라도 가슴으로 전해지는 명연기가 무엇인지 알려 준 사람이며 유혹과 배신이 난무하는, 헐리우드라는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타의 모범이 되는 삶을 생생히 증명해준 롤모델이기도 하다. 만약 나에게 단 한 명의 배우와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나는 당연히 메릴 스트립을 꼽을 것이다. 그리고 메릴 스트립에게 한 번만 안아봐도 되냐고 물어볼 것이다. 왠지 그녀는 품도 매우 따스할 것 같다. 


  세상 제일 할 일 없는 것이 연예인 걱정이라고 한다. 나도 그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메릴 스트립은 나에게 단순히 연예인 혹은 배우라는 존재로만 기억되기엔 아쉬운 존재다. 나는 그녀를 통해 기품 있고 당당한 여성의 삶을 배웠다. 그러니 부디, 나는 그녀가 더 오랜 시간 건강하길 바란다. 아주 아주 오래도록 그녀의 새 작품을 기다리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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