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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Sep 18. 2019

영화광의 고백(8) - 부드럽고 찬란했던 매혹과 타락

유년을 뒤흔든 락스피릿

  나는 만 7세부터 이승환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이승환의 영향으로 윤상과 윤종신, O15B도 즐겨 들었고 또 거기에서 가지를 뻗어 이소라, 강수지, 토이, 전람회, 자화상, 패닉의 음악을 들으며 음악적 감수성을 키워나갔다. 당시 또래들의 인기 가수는 영턱스와 쿨이었다. 나는 이승환에 대한 내 열렬한 사랑을 고백할 대상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때 Y가 기적처럼 K를 소개해 주었다.


  K와 나는 어색하게 벤치에 앉아 서로가 몇 반인지 소개하고 격식을 차린 스몰 토크를 이어나가다 음악과 만화 이야기를 하며 급속도로 친해지게 되었다. K는 서태지 마니아였고 팝 음악 전도사였으며 한국 대중음악사에도 빠삭한 지식을 가진 친구였다. 마침 그 당시 내가 빠져있던 (지금은 '안녕, 자두야'로 유명하지만 한때 우리나라 최고의 로맨스 만화를 그리던) 이빈 작가의 '크레이지 러브 스토리'를 K도 읽고 있었다. K는 그 만화에서 핵심적 테마송으로 등장한 라디오 헤드의 creep이 마침 자신이 만든 믹스테잎 안에 있다 말하고는 매우 노련한 동작으로 자신의 마이마이에 문제의 테이프를 꽂았는데, 나는 그 순간 K를 존경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며칠이 지나 나는 K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K는 악기점 사장님을 통해 구한 팝 매거진 롤링스톤을 펴놓고는 내게 팝 음악에 대해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했다. 여전히 나는 이승환의 열렬한 팬이었지만 K의 강의를 들은 후, 등교하기 전 홍콩의 음악채널인[V]를(MTV가 안 나와서...) 보며 메탈리카핸슨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아이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아마 그때부터 배철수의 음악캠프도 듣게 되었던 것 같다.


  천운으로 K는 나와 같은 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반은 달랐지만 쉬는 시간마다 복도에 모여 삼삼오오 떠들기를 즐겼다. 어느 날 K가 나에게 엄청나게 멋진 영화를 보았다고 말해주었다. 그 영화는, 제목을 입으로 내뱉는 것만으로도 '힙'한 무언가가 느껴지던 토드 헤인즈 감독의  <벨벳 골드마인>이었다.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의 퇴폐미에 흠뻑 취할 수 있다!

  

  영화 <인질>을 통해 이완 맥그리거의 광팬이 되어있었던 나에게, 그가 (K의 표현을 빌리자면) 섹시한 미치광이 락커로 등장한다는 이 영화를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비디오는 청소년 관람불가였다. K를 통해 간략한 영화의 정보를 들은 나는, 차마 엄마에게 이 비디오를 빌려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벨벳 골드마인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70년대 영국의 글램록 스타들이 할 수 있는 "나쁜 짓"은 다 하는 영화였다. 몇 번의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다행히 K의 도움(?)으로 트레인스포팅은 빌릴 수 있었고 우리는 컵라면을 먹으며 그 영화를 보다 극 중에서 이완 맥그리거가 약에 취해 변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씬에서 구역질을 해댔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나는 다른 도시로 이사를 왔고 K와도 연락이 끊겼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던 내게 벨벳 골드마인은 더 이상 중요한 영화가 아니었다. 그리고 20살이 되던 해, 빨간 비디오는 모조리 보겠다는 일념으로 동네에 몇 없는 비디오 가게를 찾게 된 나는 벨벳 골드마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벨벳 골드마인의 줄거리는 이렇다.


     줄거리 출처 - *네이버 영화 정보*

  1970년대 영국에서 유행하던 글램록 최고의 스타인 브라이언 슬레이드(조나단 리스 마이어스 분)가 월드투어 콘서트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의 자작극이었다는 것이 곧 밝혀지고, 브라이언은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는다. 그 후 그는 무대에서 사라지며 사람들에게 점차 잊힌다. 10년 후, 뉴욕 헤럴드의 기자 아서 스튜어트(크리스찬 베일 분)는 당시 자작극의 특집 기사를 맡아 영국으로 방문한다. 어린 시절 브라이언의 열렬한 팬이었던 아서는 기사 작성을 위해 브라이언의 전 매니저와 그의 부인 맨디(토니 콜렛 분), 그리고 동료이자 스캔들 상대였던 커트 와일드(이완 맥그리거 분)를 차례로 만나며 자신의 우상이었던 브라이언을 회상하게 된다. 그러면서 모두에서 잊혔던 브라이언의 놀라운 진실을 만나게 되는데.
 
내가 누구? 맥스웰 데몬!!!


  영화에서 슬레이드는 자신 이외의 평행 우주에 살고 있는 맥스웰 데몬이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어 무대 위에서 연기한다.(지기 스타더스트라는 캐릭터로 무대 했던 초창기 데이빗 보위를 대놓고 모델로 삼았으나 데이빗 보위는 이 영화를 무지막지하게 싫어했다고 함.) 당시 글램록을 하는 락커들이 숭상했던 오스카 와일드도 어김없이 등장하고 그를 연상시키는 비주얼을 슬레이드에게서 볼 수 도 있다. 슬레이드가 보여주는 시각적 묘미는 매끄러움이다. 마치 제프 쿤스의 조형물을 연상시키듯 매끈하고 정돈되어 있지만 그 안에 엄청난 에너지와 퇴폐가 깃들여 있다. 드랙퀸 저리 가라의 화려한 화장과 휘날리는 러플과 어떻게 입었을지 신기할 정도로 꽉 끼는 가죽바지와 킬힐, 폭발하는 성량과 신들린 몸짓! 잔근육 사이로 흐르는 땀은 냄새마저 느껴질 지경이었고 단지 그걸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슬레이드와 맥스웰을 연기하는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의 눈빛도 엄청나게 소중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목소리였다. 음악 영화니 당연히 노래를 잘하는 배우를 캐스팅했겠지만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너무나 홀리한 동시에 그 영광이 매우 나쁜 것에서 비롯된 환각임이 원초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완 맥그리거 리즈 시절


  이완 맥그리거가 연기한 커트 와일드는 정말 이 영화의 씬스틸러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슬레이드가 커트 와일드를 목격하게 되는 장면이 압권이다. 무대 위에서 가죽 바지 하나만 입고 온 우주의 에너지를 모아 노래를 부르던 커트 와일드는 흥이 올라 점점 탈의를 시작하고 급기야 속옷까지 몽땅 벗어버리고 방방 뛰며 춤을 추는데....... 카우치가 내게 준 충격은 이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커트 와일드는 영국의 완전 완전 밑바닥 계층의 출신으로 이름대로 인생이 와일드 그 자체이다. 슬레이드와 커트 와일드는 사업 파트너와 우정을 넘어 서 깊은 관계로까지 발전하는데 정말이지 믹 재거와 데이빗 보위의 밀애 루머를 연상시키는 부분이었다. 


매혹적이고 불안한 연기의 대가 토니 콜렛


연기의 신 크리스챤 베일, 머플러 어쩔 거야...


  여기서 또 죽이는 인물은 슬레이드의 와이프 맨디 역을 맡은 토니 콜렛과 글램록의 그루피에서 기자로 성장한 아서 즉, 크리스챤 베일이었다. 정말 정말 정말 영화 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들을 직접 맨눈으로 보고 싶은 유혹을 느낄 정도였으니. 그러니까 사실상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킬링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영국에서는 비슷한 느낌의 음악 영화가 나왔지만 벨벳 골드마인만큼이나 충격을 준 영화는 없었다. 영화를 가득 메운 음악들도 엄청나다. 이 음악은 시간이 지나도 빛바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든다. 한 번 듣고 또 듣고 천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루 리드의 퍼펙트 데이를 흥얼거리고 믹 재거의 여친 연대기를 정리하며 커트 코베인의 유서를 책받침으로 만들어 다니던, K와 나 같은 외유내강형 너드들에게 이 영화는 그야말로 바이블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는 K를 떠올렸지만 그때 K와 나는 연락이 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25살 생일, K가 내가 사는 도시로 케이크를 사들고 직접 찾아왔다. 한밤중에 만난 우리는 새삼스레 성인이 됨을 신기해하며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라디오헤드, 듀란듀란, 핸슨, 블러, 그린데이, 나탈리 임브룰리아의 노래를 부르고 내 방에서 같이 밤새 수다를 떨었다. 우리가 만나지 않은 시간 동안 K에게는 트레인스포팅에 버금가는 방황의 시간이 있었고 그 질풍노도의 시간들은 그녀의 어깨에 레터링 문신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시간을 슬기롭게 극복했고 당당히 국가고시에 통과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며칠 전 아이가 잠든 틈을 타 벨벳 골드마인을 다시 보았다. 어떤 영화들은 시간이 지나 다시 보게 되면 낡고 볼품없는 느낌인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다시금 낸시와 시드의 얼굴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당당히 입고 다니던 10대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고 여전히 그들의 노래와 몸짓에 눈을 뗄 수 없었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최근작인 <캐롤>과 <원더스트럭>도 일품이었다. 그가 단지 한 시대를 풍미한 감독에서 끝이 나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흘러간 세월은 돌릴 수 없지만 그때 그 마음을 고스란히 일깨워주는 음악과 영화가 있다는 건 정말이지 축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그러한 행운이 흘러넘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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