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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사춘기를 위한 지침서

(1) 데미안과 호밀밭의 파수꾼

by 존치즈버거


To. 친애하는 코튼 킴에게


엄마가 학창 시절에 늘 바라왔던 소망이 뭔 줄 알아? 그건 바로 ‘자퇴’였어. 정말 웃기지? 그토록 학창 시절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가졌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 공간을 탈출하길 꿈꿨다는 게. 심지어 엄마의 절친들은 모두 학교에서 만났는데 말이야.


웃긴 건 그렇게 학교를 싫어했으면서도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준비를 하고 전교에서 손에 꼽힐 만큼 학교에 일찍 등교했다는 사실이지. 인간은 정말 아이러니한 존재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학교 자체를 싫어했다기보다는 그 속에 박혀있는 규칙과 관념들이 미치도록 싫었던 것 같아. 너에게도 그런 날이 오겠지?


물론 네가 학교라는 곳에 너의 10대를 묻기로 했다면 이왕 다니는 거 잘 다녔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어른들의 틀에 박힌 규율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청소년이 되길 바라기도 해. 충실히 학업을 수행하는 것과 의문을 가지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다른 영역의 일이니까.


각설하고. 언젠가 다가올 너의 번뇌와 방황을 위해 내가 너에게 건넬 책은 바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야. “아니, 엄마는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쌍팔년도 필수 권장도서야?”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래, 내가 10대 시절에도 이 책들은 권장도서 목록에 빠지지 않는 책들이었지. 나의 선배들에게도 그랬고 아마도 너희 세대에도 이 책은 빠지지 않을 거라 생각해. 너무 고루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 말을 좀 들어봐.




내가 데미안을 처음 읽은 건 초등학생 시절이었어. 그때는 만화로 보는 고전 시리즈가 굉장한 유행이었지. 별당 아씨전이나 구운몽 같이 한국 고전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나는 서양 고전에도 도전을 했어. 안타깝게도 어감이 예쁘다는 이유로 데미안을 집어 들었지. 싱클레어와 데미안이라는 두 녀석의 우정 이야기로 생각했던 나의 기대는 철저히 무너졌어. 초반 몇 장을 보다가 금방 후회했어. 도통 뭔 소린지 알 수 없었거든. 아이들의 시각에 맞게 각색을 하고 명랑만화의 그림체를 가지고 있어도 데미안은 내가 가닿을 수 없는 오묘하고 희한한 세계였어. 끝을 보지 못하고 책장을 덮고 재빨리 어린 왕자에 매진했어. 그렇게 데미안과는 멀리 떨어져 살다가 고등학교 2학년 무렵에 다시 그 책을 집어 들게 되었지.


“와우! 데미안 겁나 멋져.”


다시 만난 데미안이 정말 좋았어. 그때 당시 내게 꼭 필요한 존재였거든. 나는 상상의 친구처럼 데미안을 속으로 부르며 요동치는 내면을 그에게 기댔지. 불필요한 동작 없이 손날 몇 번으로 상대의 급소를 가격하는 무협지의 주인공처럼 데미안은 그 나이 때 아이들 다수가 지닌 흘러넘치는 흥분 하나 없이 단 몇 마디로 상대를 제압했어. 싱클레어를 공포로 빠뜨린 프란츠도 귓속말 한 방으로 무너뜨렸지. 데미안은 비굴하게 군 적이 없어. 상대가 아이든 어른이든 가릴 것 없이. 특유의 분위기는 그를 얕잡아 볼 수 없게 만들었고 게다가 지식의 양은 또 어찌나 방대한지.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져 정해진 답만 줄줄 외우던 내게, 기존의 가치관을 허물며 자신의 관점을 독특한 철학으로 만들어 내는 데미안을 보면서 나는 깊이 감명받았어. 아무리 어린 아이라 해도 내면의 단단한 자기만의 중심을 지닌 사람 앞에서는 어른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거든. 눈치 보고 겁먹고 어떻게 해서든지 예쁨을 받으려 노력하면서도 그런 자신에게 한없이 연민을 느끼는, 마치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에 등장할 법한 캐릭터였던 내게 데미안은 신세계였지. 지적이고 날카로우며 대범한 동시에 위험한 유혹을 속삭이기도 하는 아이.


사실 데미안이라는 소설은 관념적인 소설이야. 무언가 엄청난 사건이 등장해서 스펙터클한 위기를 맞기보다는 싱클레어라는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며 삶의 본질에 대해 묻지. 그래서 다소 어렵게 느껴질 거야. 하지만 그 어려움을 돌파하면 너도 데미안이라는 아이에게 빠지게 될지 몰라. 물론 요즘 말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중2병 말기의 어투가 다소 거슬리긴 하겠지만. 난 그것도 좋더라. 자기 색깔이 뚜렷한 사람들도 나름 좋지 않니?


프란츠라는 동네 불량배 녀석에게 허세를 떨어 자기 자신을 나락에 빠뜨리기 전까지만 해도 싱클레어의 인생은 무탈했어. 유복한 가정에서 누나와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학군 좋은 곳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남학생. 나름 엄친아라고나 할까? 하지만 프란츠 무리에게 ‘꿀리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발동하며 수렁에 빠지고 말았지. 세 보이려고 만든 거짓은 프란츠의 먹잇감이 돼. 부유한 막내 아들내미로 좋은 교육을 받는 스스로의 삶을 좋아하면서도, 동네 불량배들의 세계에서도 적당히 어울리고 싶다는 ‘인싸’로의 계획은 무참히 틀어지고 싱클레어는 두 세계 어디에서도 어울리지 못하는 심정적 ‘아싸’가 되어버리지만 이를 통해 데미안과 교류하게 되었으니, 역시 삶은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선사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물론 데미안이 천국이기만 한 건 아니지만.


예나 지금이나 한 번은 싱클레어와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시기가 오는 것 같아. 중학교 때 우리 반에도 그런 아이가 있었어. 일명 ‘일진’이라는 무리와도 잘 어울리면서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남자애가 있었어. 선생님과 아이들의 총애를 동시에 받는 그 아이는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모두와 교우 관계를 가졌지. 선을 넘는 적은 없었지만 주말에 일진들과 어울려 아울렛에서 옷을 샀다던가 셰이크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용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그 아이를 동경할 수밖에 없었어. 공부만 잘하는 것도 큰 축복인데 그 아이는 마치 헐리웃 영화에 등장하는 너드와 럭비부의 세계를 교묘히 넘나들며 재주를 부리는 것 같았거든. 싱클레어도 그런 마음이 있었을 거야. 당연하다는 듯 사립학교와 저택 같은 자신의 보금자리에 속하면서도, 프란츠의 거친 세계에 섞이기엔 그 모든 특권이 스스로를 유약하게 만드는 약점이라고 느끼면서 저지르게 되는 실수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문제일 뿐 아마도 싱클레어의 마음속에 더 강한 욕망이 있었을지도 몰라. 이를 테면, 독립의 욕구 같은 것? 그러니까 부모님의 세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싶은 욕망이랄까? 누군가 만들어진 세계 속에 부품처럼 작동하는 것이 아닌 온전히 나라는 존재로 우뚝 서고 싶은 것 말이야. 답답한 규칙과 틀에 속박되지 않고 쿨내를 진동하는 진짜 청년으로의 나. 나의 세계를 오로지 나의 힘으로 제어하고 싶은 욕구라고나 할까.


나는 심리학에는 문외한이라 구체적으로 사춘기와 그 심리가 뭔지는 모르지만 그 시기를 거쳐 온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아마도 사춘기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견고한 세계를 부수는 작업을 시작하는 시간인 것 같아. 어릴 때는 어른들의 말을 무작정 따르지. 성격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거나 어른이라는 세계는 너무나도 커다란 성벽처럼 느껴질 거야. 그러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 발들이고 배움을 거치며 점점 성숙하지. 무럭무럭 자라나는 키만큼이나 마음의 지도만큼이나 뇌도 복잡해질 테고 그러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지. 어른들이 걱정, 위로, 연민이라 부르며 내뱉는 말들 중 어떤 것은 굉장한 헛소리임을 알게 될 테고. 어쩔 수 없이 가장 가까운 어른들의 민낯을 보게 되는 날도 더러 있을 테고. 어지럽게 쌓이는 시간과 감정들. 내 마음을 몰라주는 이 세상아, 그냥 멸망이나 해버려라 같은 말들을 일기장에 어지럽게 펼쳐놓겠지. 나한테는 근엄하게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살기 위해 타협하는 어른들의 모습에 화가 솟을지도 몰라. 그러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춘기의 꽃망울이 한껏 부풀어 오르는 듯 해. 그 무엇보다 강렬한 색채와 향기를 내뿜으며.


도래할 그날을 생각하면 사실 조금 두렵기도 하지만, 나는 최대한 미소 띤 얼굴로 너에게 이 책을 선물해 줄 거야. 물론 데미안이라는 소설을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과 조사가 필요하긴 해. 카인과 아벨 같은 성경의 내용도 등장하고 어려운 용어나 철학적인 이해가 필요한 대화들도 자주 등장하곤 하니까. 절대 쉬운 소설은 아니야, 자칫하면 오독에 빠질 수도 있고 가뜩이나 예민한 너의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지도 몰라. 특히나 영유아기 때부터 ‘짤(meme)’이라는 문법에 익숙해진 너에게는 고역이 따로 없을지도 몰라. 하하. “그럼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런 책을 읽으라는 거야?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엄마까지 왜 그래?”라고 묻는 다면, 말해주는 게 인지상정. 다만 그 이유를 말하기 전에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 의문은 잠시 넣어두고 내 이야기를 들어줘.





데미안과 호밀밭의 파수꾼은 세계와 불화하는 흔들리는 어린 날의 내면을 이야기했다는 면에서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전혀 다른 결을 가졌어. 데미안은 자신이 머무는 세계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가두는 틀을 깨부수려는 내용이라면 호밀밭의 파수꾼은 어른들이 내보이는 위선과 부조리에 상처 받으면서도 자기 안의 순수한 아이의 세계를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아이가 등장하는 내용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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