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태어났다. 엄마는 나이 마흔 넘어 당신 찍시의 아들을 얻었다. 15년간 임신과 출산의 고군분투로 얻은 마지막 열매였다. 엄마는 아들을 품에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까. '내 찍시' 아들을 안고서는 따뜻한 눈빛으로 아기를 바라보았을까. “이제 고생 끝났져”하고 친척 어른들은 엄마를 위로하고 도닥여주었을까. 미운 세 살, 어린 나는 동생의 탄생을 어떻게 맞이했을까.
어디까지가 실제의 기억이고, 어디부터가 나의 상상인지 알 수 없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느낌 한 조각을 부여잡고 그저 내 마음 흐르는 대로 상상화를 그려볼 뿐이다.
첫 기억. 동생과 나는 마루에서 놀고 있다. 초석을 세워서 집을 만들었다. 동생은 밖에서 기어 다니고, 나는 초석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듯하다. 동생은 나를 찾지 못한다. 나는 초석 안 어둠 속에 있다. 양 무릎을 세워 모아 양 팔로 끌어안고 머리를 숙인 어린아이.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희미한 어둠이 편안했을까, 무서웠을까.
두 번째 기억. 나는 시렁 속에 숨어 있다가 잠들었다. 왜 그 안으로 들어간 것일까. 숨어 들어갔는데,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 아무도 찾는 이 없다. 집 안에서 사라진 나의 존재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에게도 찾아지지 않는 어린아이. not to be found.
동생은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였다. 반면, 두 살 많은 막내 누나, 나는 고집 세고 욕심이 많았다. 동생이 태어난 후에도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엄마 젖가슴에 달라붙어 떼를 쓰곤 했다. 엄마 젖 좀 달라고, 동생을 밀치고 엄마 품을 차지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엄마는 나를 밀치고 동생을 품에 안았다. 엄마 품에서 밀려난 미운 세 살 여자 아이, 나는 엄마가 미웠다. 동생만 예뻐하는 엄마가 한없이 밉고 원망스러웠다. 한편, 엄마는 딸이 밉지 않았을까. 어린 딸이 애처로워 보이면서도 엄마 마음 몰라주는 딸이 얄밉기도 했을 것이다. 동생에게 양보할 줄 모르는 딸이 욕심 많고 이기적이라 생각했겠지. “너는 누나니까, 누나가 양보해야지. 넌 지금까지 많이 먹었잖아.", " 이젠 혼자서 해야지. 넌 혼자서도 할 수 있잖아." 엄마는 딸에게 그렇게 말했을 것 같다.
엄마는 노산이었다. 몸이 허약한 엄마는 젖이 부족하여 아랫 동서에게 젖동냥을 하며 막둥이 아들을 키웠다고 했다. '내 찍시' 아들 하나 건강하게 잘 키우고 싶은 엄마 마음을 헤아려해 본다. 가난한 살림에 늦둥이 아들에게 먹일 것은 없고, 젖은 잘 나오지도 않고, 조막만한 막내 아들 바라보며 얼마나 가슴 저리고 안쓰러웠을까.
딸딸아들딸딸아들. 엄마는 15년 동안 해마다 임신과 출산을 거듭하며 6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 사이에 한 생명은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6 남매 아이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저 아이들을 다 먹이고 키우고 살려야 하는데. 잘 키울 수 있을까?” 불안하고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4.3 사태에 부모를 여의고, 배우고 싶지만 학교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글 앞에서 까막눈인 엄마는 당신 아이들은 잘 배우고 잘 커서 궁핍하지 않게 풍요롭게 당당하게 살아가길 소망했다. “어깨 펴고 기십평 살아시믄(기세등등하게 기 펴고 살았으면)” 하는 게 엄마의 소원이었다.
부모에게는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그래도 더 아픈 손가락이 있다. 엄마에게는 가르치지 못한 큰딸과 잘 먹이지 못한 막내아들이 유독 더 아픈 손가락이었다. 귀한 막둥이, “내 찍시”의 아들을 낳았지만 풍요롭게 마음껏 젖을 물려보지도 못한 막내아들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했다.
세 살 어린 여자 아이에게 친척 어른들은 말했다. “니가 젖 다 빼사 먹어브난 자이 저츠륵 못먹언 말라시네(너가 그렇게 젖을 다 먹어버렸으니 동생은 저렇게 엄마 젖을 못 먹어서 몸이 말랐다).”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 말이 슬프고 억울했다. 어른들의 혀 차는 소리는 늘상 아이를 따라다녔고, 아이는 동생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짊어진 채로, 자유롭지 못했다.
미운 세 살, 엄마 품에서 밀려난 어린 나는 외롭고 쓸쓸했다. 엄마 품에서 밀려나 동생에게 양보하기도 싫지만, 그렇다고 싸우고 밀치고 경쟁하는 것은 더 싫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어린아이는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까. 초석 안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한 장의 사진처럼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렇게라도 자기 자신을 꼬옥 안아주고 싶었을까. 마치 엄마가 아기를 안아주듯이 자기를 안아주었던 걸까. 작고 여린 양팔로, 깍지 낀 양 손으로, 두 다리를 꼬옥 감싸고 그렇게 어린 자신을 달래주고 위로해주고 싶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을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