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온 지 삼 년도 되지 않아 시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상황. 애당초 가진 것이 많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있던 집과 가게마저 내어줘야 하는 상황에 몰리고 시아버지 집에 살고 있던 우리는 집을 비워줘야만 했다. 돌 지난 갓난아기를 데리고 어디론가 이사를 해야 하는데 그는 단돈 한 푼 가진 게 없는 알거지였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 미로에 갇혀버린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하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사업이 위태위태하면서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신세가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결혼하고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내려오면서 친구들이 "거기 가서 뭐할래?"라고 물을 때 나는 웃으며 "전업주부"라고 했었다. 전업주부가 꿈이라고, 그때는 그랬다. 일하지 않고 살림만 하는 여자 팔자는 아니겠지만 당분간은 전업주부로 부엌살림도 한번 해보고 싶었다. 살림에는 영 취미도 없고 재주도 없는지라 관심 밖이었지만 안 해보던 것을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저녁 밥상을 차려놓고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기분도 나름 행복했다. 임신하고서 십자수도 하고 한지공예도 하면서 아기자기한 재미가 나쁘지 않았다. 내가 그래도 한 꼼꼼하는 성격임을 알았다. 털털하고 대범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겉으론 대범한 척, 털털한 척 나를 가리고 있었던 것일 수 있다. 감추어진 이면에 세심하고 꼼꼼한 면이 더 많았다. 십자수로 예수상을 만들며 긴 시간 그것에만 몰입하는 것이 신체적으로 고단하기도 했지만 한 올 한 올 이어서 형체가 만들어질 때의 쾌감과 희열이 있었다. 처음 시작한 사람이 난이도 높은 것도 잘한다는 칭찬도 들었다. 뭐든 내가 하면 못하랴 싶은 마음이었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완성한 예수상을 대모님과 시누이 집에 선물하면서 뿌듯하고 행복했다. 대모님과 시누이 집에는 아직도 내가 드린 십자수 예수상이 걸려있다.
전업주부로의 삶, 화려한 봄날은 잠시,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땡뻩 뜨거운 여름 더위와 긴 장마의 그림자가 먹구름을 몰고 머리 위로 밀려오고 있었다. 시아버지 일을 도와드린다고 안정적인 직장을 때려치우고 시댁 고향으로 내려간 그는 집을 구할 돈은커녕 생활비 한 푼 가져다주지 못했다. 아이와 둘이서 살아야 했다. 그를 믿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이를 데리고 연고 없는 낯선 지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개인과외뿐이었다. 대학생을 시간제 알바(베이비시터)로 고용하여 아이를 맡기고 고액과외를 시작했다. 아이는 엄마 없이도 잘 놀고 잘 먹고 잘 자랐다. 백일 전에는 한밤 중에 쉬지 않고 울어대며 울음이 그치지 않아 응급실로 달려가다 돌아오기를 여러 번 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영아산통이라고 했다. 다행히 백일이 지나면서 영아산통도 사라졌고 아이는 건강했다. 아이가 자라면서 엄마는 워킹맘의 고단한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다가 태어난 지 1년. 돌잔치를 핑계 삼아 가족들끼리 온천여행을 갔다. 가족이라고 해봐야, 시부모와 나의 가족(3인) 그리고 시누이 가족(4인)과 결혼 안 한 시동생까지 열 명이 전부였다. 부산에서 주변인들의 축하를 받으며 화려한 돌잔치를 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도피하듯이 떠난 여행이었다. 시누이는 서울에서, 시동생은 천안에서, 우리는 부산에서 가는 거였으니 중간 지점인 충남으로 가게 되었다. 그것이 인연이었을까. 이후에 우리는 아무 연고지 없는 낯선 지방 충남 아산으로 이사했다.
돌잔치에서 시아버지는 기울어가는 사업으로 궁색했지만 할아버지로서의 체면을 세우고 싶었던지 돌상을 차려야 한다고 우겼다. 나는 지금 이 처지에 돌상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겉으로는 어색한 웃음 짓고 있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져 가는 심정이었을 게다. 시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아버지는 여기저기서 사업자금을 끌어다 쓰면서 시누이의 시아버지(그러니까 사돈어른이 되는 셈이다)에게까지 돈을 빌려다 썼다. 시누이도 애가 탔을 것이다. 당신 아버지가 시아버지에게 빌린 돈을 갚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첫 조카 돌이라고 모이기는 했지만 편안한 웃음을 지을 수가 없었을 게다. 시어머니는 당신이 돈 벌러 나간다며 요양 간병일을 다시 할 거라 했고, 시아버지는 그래도 체면 구기지 않으려 목에 힘을 주고서는 거리에서 붕어빵 장사를 해서라도 다시 일어설 거니까 두고 보라고 큰소리쳤다. 가족들은 침묵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세찬 폭풍우,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은 부산을 떠나 아산으로 이사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2002년 봄볕 따뜻한 5월. 우리가 살던 집 마당에 689 친구들이 모였다. 그는 이삿짐센터를 하는 후배에게서 5톤 트럭을 빌려왔고, 15평 임대아파트에 들어갈 만큼의 짐들만을 챙겨 싣고, 나머지는 친구들이 나눠 가졌다. 결혼 후 첫 생일날에 그에게서 받은 생일 선물 자전거, 시어머니께서 쓸고 닦으며 모아놓은 장독대의 항아리들, 임신에서 출산 후까지 내가 즐겨 앉아 시간을 보내던 흔들의자, 부엌 다락방 위에 암실을 만들면서 사들여놓고 한번 써보지도 못한 현상 인화 장비들, 서울에서 내려올 때 북카페에 기부하고서도 남주지 못해 내 곁에 남겨놓았던 수백 권의 책들...
아아, 아련한 기억. 그와 나는 5톤 트럭에 몸을 싣고 경부 고속도로를 달려 충남 A시 S아파트에 도착했다.
90년대 끝자락, 99년 11월 28일에 결혼하여 만 3년을 채 넘기지 않은 때였다. 글라라와 프란치스코는 친구들이 있는 따뜻한 남쪽나라 부산을 떠나 황무지 벌판으로 나아가는 기분이었을 게다. 이제 낯선 타향,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이방인의 삶이 시작되겠지. 유대인들의 광야에서 40년과 같은 험난한 시련이 그들 앞에도 놓여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며 마음은 덤덤하면서도 개미들이 떼거리로 문지방을 넘어 올라오듯이 숱한 감정들이 자잘하게 기어 다니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부산에서의 추억들이 떠올라 그리움에 젖어보기도 하고, 689 친구들에 대한 고마움과 아쉬움, 시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동정이 되살아나다가,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하고, 어린 딸이 안쓰럽고 미안하기도 하고. 원망과 분노, 실망감과 낙담, 좌절과 우울 무기력....
시댁에 대한 원망과 한탄으로 우울 무력감에 빠져있으면서 어린 딸을 잘 돌봐주지 못한 것 같다. 그럼에도 건강하게 잘 자라준 딸이 마냥 고맙다. 글을 쓰면서 새롭게 알게 되었다. 부산에서 떠나올 때 잃어버린 것들이 꽤 많았구나. 짐을 줄이면서 많은 것들을 버리거나 친구들에게 주고 왔다. 그에게는 생일날 689에게서 선물 받은 장구, 나에게는 오래된 수동 카메라 가방이 버려지지 않고 아직 남아있다.
부산에서 함께 했던 689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다. 모두들 정말 고마웠다. 부산에서 너희들과 함께 보낸 그 시간이 내게는 화려한 봄날, 행복했던 시절이었네. 우리 집 사랑방에 모여 앉아 도란도란 수다 꽃을 피우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 하늘소리의 미래에 대해 고심하며 숱한 고뇌의 밤도 있었지만 카드놀이하며 밤새 웃고 떠들고 신나게 놀던 기억이 더 많네. 번갈아 가며 내 딸을 안아주고 업어 재워주고 하던 나와 함께 내 딸을 키워낸 이모 삼촌들이었지. 갑작스러운 이사로 우리가 부산을 떠나오는 바람에 689 모임도 흐지부지 되어버렸으니 안타까운 마음에 착잡하다.
멀리 있다는 핑계로 너희들 결혼식에는 가보지도 못했지, 정말 미안했다. 우리 결혼식은 너희들이 온 정성을 다해 화려한 축제로 만들어주었는데, 그에 대해 보답도 못하고, 너희에게 빚진 것이 많네. 자서전 글쓰기를 하면서 결혼식 사진을 펼쳐 보니까 너희들 젊은 날이 떠올라 마음 흐뭇했다. 그땐 정말 에너지 넘치고 밝고 명랑한 신명 나는 하늘소리였는데. 고천문 낭독하던 모습이랑, 너희들이 건네준 결혼 10 계명을 보며 피식 웃음도 나왔다. 그래서였을까. 시어머니 시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그들을 외면하지 못한 것이 너희들이 만들어 준 십계명을 지키느라 그런 걸까.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려 애는 썼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분들께 효도하지는 못한 것 같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시아버지도 가슴 아프고, 사람들이 삶이 애달프네.
너희들에게도 드러내고 말하지 못한 삶의 애환들이 많이 있었겠지.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에는 지나온 이야기보따리 다 풀어놓으며 예전처럼 사랑방에서 수다도 떨고 막걸리 한잔 걸치며 걸적 지근하게 한판 놀아보자
그런 날이 올까?, 오겠지, 올 거야 아마도. 꼭 올 거야. 그날까지 모두들 건강하기를.
* 글라라의 십계명 : 하나밖에 없는 프란치스코를 흠숭하라 / 프란치스코를 아프게 하지 마라 / 아들 딸 만드는 날을 거룩하게 지내라 / 시아버지 시어머니에게 효도하라 / "사랑한다"는 말과 행동을 아끼지 말라 / 따로 사둔 권투 글러브를 아낌없이 사용하라 / 글라라는 하늘소리 식구임을 잊지 마라 / 한 달에 7일은 쉬는 날. (꼭 지킬 것) / 부부싸움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처하라 / 모든 일은 함께 대화로 해결하라.
*프란치스코의 십계명 : 하나밖에 없는 글라라를 흠숭하라 / 글라라를 슬프게 하지 마라 / 아들 딸 만드는 날을 거룩하게 지내라 / 장모에게 효도하라 / 계집 둘 가진 놈의 창자는 호랑이도 먹지 않는다 / 글라라의 출타 시 이유를 묻지 마라 / 한 달에 7일은 쉬는 날 (꼭 지킬 것) / 글라라에 대한 시어머니의 사랑은 프란치스코에게 달려 있음을 명심하라 / 모든 일은 함께 대화로 해결하라 (특히 글라라의 의견이 존중되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