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벗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The greatest thing in the world is for a man to know how to be his own.”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어떻게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지 아는 것이다.”
우리는 평생 ‘보여지는 나’를 편집하며 산다.
직장에서는 유능하고 결단력 있는 리더의 표정을, 집에서는 든든하고 자상한 부모의 목소리를,
그리고 SNS에서는 세련된 취미를 즐기는 행복한 여행자의 뒷모습을 연기한다. 25년 넘게 플랫폼 마케팅의 최전선을 경험한 나에게 ‘브랜딩’은 숙명과도 같았다. 상품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포장지를 고르듯, 나라는 존재 역시 세상이라는 시장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매끄럽게 다듬어왔다. 하지만 그렇게 편집된 '유저 인터페이스(UI)'가 화려해질수록, 그 이면의 '소스 코드'인 진짜 나는 점점 더 낯설어지고 있었다.
16세기의 미셸 드 몽테뉴는 이미 이러한 인간의 비극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고등법원의 판사와 보르도의 시장이라는 무거운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았지만, 그 가면이 자신의 살결과 하나가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위대하고도 어려운 과업을 단 한 문장으로 정의했다.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을 아는 것이다. 몽테뉴에게 이것은 단순히 이기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면의 ‘아리에르 부티크(Arrière-boutique)’, 즉 ‘영혼의 뒷방’을 가꾸는 일이었다.
그는 상점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는 앞방은 깨끗이 치우고 친절해야 하겠지만, 그 뒤편에는 오직 주인장만 들어갈 수 있는 비밀스러운 뒷방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곳은 타인의 평가, 사회적 직함, 가장으로서의 의무라는 무거운 구두를 벗어 던지고 들어가 오직 나만의 언어로 숨 쉴 수 있는 자유의 성역이다.
오십이라는 나이는 바로 이 ‘뒷방’의 인테리어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기다. 명함에서 직함이 빠지고,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품을 떠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무엇을 하는 나(Doing)’가 아닌 ‘그저 존재하는 나(Being)’와 마주하게 된다. 평생 성과라는 엔진을 돌리며 달려온 우리에게 이 고요한 존재감은 때로 공허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나 자신이 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갑자기 찾아온 이 자유를 감당하지 못해 다시 타인의 시선이 가득한 앞방으로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이제는 이 곳에서 탈출해야 한다.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모순과 서투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연약함까지도 ‘나의 일부’로 인정하고 다정하게 껴안는 일이다. 몽테뉴가 자신의 사소한 결점과 변덕까지도 《수상록》에 낱낱이 기록하며 스스로를 관찰했던 것처럼, 우리도 '진짜 나'라는 자아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세상이 당신에게 입혀준 옷이 아무리 비단결처럼 화려해도, 그것이 당신의 몸에 맞지 않는다면 결국 상처를 남긴다. 이제 그 무거운 외투를 벗고, 당신의 영혼이 가장 편안해하는 옷을 입어야 한다. 나 자신이 되는 법을 터득한 사람에게 인생의 후반전은 더 이상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 진짜 나를 알아가는 ‘축제의 시간’이 될 것이다.
[아리에르 부티크 : 영혼의 뒷방]
성과 없는 취미를 의도적으로 시작하라.
돈이 되지 않고, 누구에게 자랑할 필요도 없으며, 오직 당신의 감각만을 일깨우는 일을 찾아라. 서투른 목공이든, 목적 없는 산책이든 상관없다. 결과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행위만이 당신을 사회적 가면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다.
명사가 아닌 형용사로 자신을 정의하라.
‘대표’, ‘이사’, ‘누구의 부모’라는 명사(Noun)를 걷어내라. 대신 나는 어떤 향기를 지닌 사람인지, 어떤 순간에 진심으로 미소 짓는지, 어떤 색깔의 사유를 즐기는지 탐색하라. 직함이라는 껍데기가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당신만의 고유한 형용사가 빛나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