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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lisopher May 12. 2020

혁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세상의 어떤 혁신




우리 회사의 구내식당에서는 지난 20여 년 간 쌀을 세 번 씻고 헹군 다음 압력솥으밥을 지어왔습니다. 이 방법이 우리 회사 구내식당의 밥 짓기 표준이 되었고 회사 직원들은 대체로 이 밥맛에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새로 부임하신 사장님이 구내식당에서 밥 두어 숟가락을 드시고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시더니 자신이 프린스 애드워드 섬 지사에서 근무할 당시 먹었던 밥맛이 그립다며 앞으로 우리 회사 식당도 그 밥맛을 구현했으면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곳 구내식당의 대표 셰프로서 최고의 밥맛을 위해 오늘부터 약 석 달간 TF을 꾸려 운영하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이 기간 동안 국립 셰프 대학 졸업 후 회사 주요 지사의 구내식당에서 기획을 맡아 온 경력을 살려 최고의 밥맛을 찾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물론 식당 최일선에 계신 여러 셰프님들의 도움이 절대적이겠습니다.

- 네 김일식 셰프님 손을 드셨는데 하고 싶은 말씀이 뭔가요?

-지난 십수 년간 잔뼈 굵은 전문가들이 쌓아 온 노하우로 가장 안정적인 밥맛을 직원들에게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의 밥맛이 아무리 좋다 하나 우리는 우리 실정에 맞는 조리법이 있는 겁니다.

-김일식 셰프님이 꽤 오랫동안 이곳의 중간 책임자로 활동해왔고 많은 직원들의 입맛에 맞는 식단을 꾸려온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더 나은 밥맛이 있다고 하면 어떻습니까. 셰프로서. 우리는 그 맛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말씀엔 동의합니다. 하지만 우리 회사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 그들 입맛에 맞추기 위해 수시로 모니터 해왔고 최근 90년대 출생자들이 부쩍 늘었는데 그들을 사로잡기 위해 주 1회 이상 맛 평가를 고 있습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 많은 직원들이 밥이 차지고 좋다며 칭찬을 하고 있는 것이고요.

-저도 그 점에 대해서는 모르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회사 셰프님들의 인적 구성을 살펴보니 모두 10년 넘게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이는 업무 만족도가 높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나 한편으론 구내식당이 정체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어쩌면 직원들도 그 정체된 맛에 익숙해져 버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김이식입니다. 김일식 셰프와 호흡을 맞추며 여기까지 왔고 저는 우리 식당 밥맛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한 말씀 덧붙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저희는 지난 세월 최신 트렌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체 연구팀을 꾸려왔고 국내의 권위 있는 밥 짓기 대회에서 여러 차례 입상한 경력과 나아가 신생 동종 업계 종사자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있을 만큼 자타공인 최고의 밥 짓기 셰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최근에는 특유의 밥 냄새를 잡아내는 8자 트위스트 쌀 씻기 방법을 개발해 상표등록 및 영업비밀로서 특별 관리를 하고 있는 상태지요. 그런데도 사장님 한 분의 추억 때문에 우리가 쌓아 온 정성과 기술에 대한 권위가 부정되고 있는 것 같아 속상할 따름입니다.

-속상하셨다니 미안하고 안타깝습니다. 김이식 셰프님의 밥맛에 대한 자부심 존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열린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사장님은 프린스 애드워드 섬에서도 그리고 이곳에서도 밥을 드신 분 아니겠습니까. 두 가지를 먹어 본 사람이야말로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맛을 비교하고 차이를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그야......

-그래서 그 차이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사장님 비서인 박양식 대리를 지난주 그 섬으로 급파했고 어제 돌아왔답니다.  어느 경우엔 비전문가의 입이 정확할 때가 있으니까요. 대리님을 불러 과연 그 맛이 어땠는지 들어봅시다. 박양식 대리님?

-박양식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애드워드 섬의 밥맛, 좋았습니다. 제가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뭔가 감칠맛이랄까 밥알의 탱글 함이랄까. 입안을 휘감는 고소하고 단맛이 절묘하게 배합된 맛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아무튼 관계자들에게 그 비법을 물어보니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잘 쓰지 않는 양손 타원형 트위스트 법으로 3번 씻어낸다고 합니다. 혹시 몰라 그들에게 부탁하여 한솥 담아왔습니다. 12시간 정도 지나서 처음 밥맛보단 못하겠으나 그래도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웅성웅성

-자 맛이 어떤지 누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저는 김삼식 셰픕니다. 박양식 대리님 말대로 고소함과 단맛이 7대 3의 비율로 제 혀끝에서 춤을 추네요. 저 역시 쌀 좀 씻었다면 씻어 본 사람인지라...

-와 역시... 김일식ㆍ김이식 셰프님은 어떤가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김이식 셰프님은요?

-글쎄요. 12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저는 제가 씻어 지은 밥이 더 맛있는 것 같습니다. 프린스 섬 밥 한 숟가락을 입 안에 넣고 침을 섞은 다음 10초간 머금었을 때 밥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보면 밥알의 끈기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어서 까다로운 직원들의 입맛을 만족시켜줄 수 있을지 우려도 되고요.

-그건 김이식 셰프님의 주관적 판단일 수 있습니다. 사장님이 맛이 낫다고 누차 얘기를 했고 직접 다녀온 박양식 대리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지 않습니까. 회사 직원들은 더 나은 밥을 먹을 권리가 있다고 봅니다. 프린스 애드워드 섬 스타일의 밥 짓기로 일단 진행해 봅시다. 우리도 밥 짓기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때가 온 것입니다.

TF 팀에서는 프린스 섬과 가장 비슷한 맛을 낼 수 있도록 양손 타원형 트위스트 씻기 법을 계속해서 시뮬레이션 돌려보신다음 기록하여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일을 김삼식 셰프님이 맡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러 셰프님들의 의견을 존중합니다만 기왕 개혁을 해야 한다면 기존의 틀에서 안주하지 말고 도전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사장님과 임원진들은 우리 구내식당 셰프님들이 혁신과 변화를 거부하는 묵은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렇지 않다는 모습도 보여주고 차석 셰프로 승진할 수 기회도 얻으면 금상첨화 아니겠습니까. 자 자 프린스 애드워드 섬 스타일의 타원형 트위스트 씻기 법의 성공적 안착을 위해 파이팅해봅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은 제가 사겠습니다. 다들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날 회의장에는 셰프들을 도와 밥과 반찬을 맡아주던 나이 지긋한 어머니 몇 명도 참석하여 듣고 있었다.


-아니 밥이야 두어 시간 뿔려 놨다가 압력솥으로 돌리면 쓴디. 쩌냥반이 뭐시라고 했쌌는 당가. 뭐시기. 테.. 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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