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polisopher
May 18. 2020
5. 18. 민주화운동이 40주년을 맞이했다. 4. 19. 혁명처럼 세월감이 느껴진다.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광주시민에 대한 폭력과 살인, 해마다 생생한 증거를 보고 있으면서도 믿어지지 않는다. 저 정도의 국가 폭력은 전쟁 전후에 있을 법한 상황 같아서다.
5. 18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국민을 지켜야 할 군대가 그들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국민을 무참히 짓밟은 사건이다. 군대가 국민을 압살 했던 역사가 어디 우리뿐이랴. 그런데도 상왕 노릇하는 듯 여전히 위세 넘치는 찬탈자들의 모습을 보자니 화가 난다.
전두환은 여전히 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 그 손 위에서 벌어졌던 살인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한다. 아베의 사죄를 기대하는 건 어쩌면 허황될지도 모른다. 600만 유대인의 학살자 아이히만의 순진무구한 표정도 그래서 그랬나 보나 싶다. 전두환도 저러는데.
전두환은 성공한 혁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짱짱하게 산다. 건강이 중요하니까 종종 골프도 다니는 모양새다. 아주 위풍당당한 것이다.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그렇게 곤봉으로 내려치고 대검으로 찔렀으며 총으로 쏘았을 뿐이니까.
TV에 나온 생존자들과 희생자 유가족들은 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운다. 여전히 가슴을 치고 치를 떨며 두려워한다. 어떤 이들은 제 命에 살지 못하였다. 화면 속 전두환은 화끈하며 생동감 넘친다. 그러니 저들은 여전히 40년 전에 멈춰 서 있는 거다.
80년대는 군인 끗발이 좋았던 군바리 시대. 그 그늘 아래 경찰도 한 가닥 했던 때가 있었다. 정권을 잡고 시간이 흐를수록 피에 굶주린 폭력은 군에서 경찰로 전이된다. 군은 왠지 국민의 군대로 돌아간 듯했지만 경찰만큼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나날이 불탔다.
같은 제복이지만 요직은 군인의 몫, 비슷한 제복을 입었지만 영원한 열등생 일수밖에 없었으니 몸과 마음을 다해 충성 또 충성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 군복의 핏자국을 지워주겠노라 작심이라도 한 듯 최루탄과 몽둥이, 물과 전기로 저 국가를 보필했다.
보안실 여기저기에서 두들겨 맞고 물을 삼켜야 하고 음식을 게워내야 했던 수많은 시민들, 학생들, 그렇게 쉬쉬하는 어른들 맞은편에는 김일성을 돼지로 알고, 낯선 사람을 신고하면 연필도 받고 공책도 받았던 독재를 은근 찬양하던 천진한 아이들도 있었다.
물론 경찰답게 강도도 잡고 살인범도 잡아 정의를 구현하였지만 시민을 상대로 강도가 되거나 살인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군인이 되고 싶었던 경찰은 마침내 소원을 이루게 되었는데 6. 10. 민주항쟁에서 그들이 누구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보게 된다.
5월은 군대 6월은 경찰, 군인이 열어놓은 폭력의 시대, 경찰이 유지 관리하여 최고 정점에 이르렀으니 국민이 주권을 회복하자마자 경찰은 디스토피아적 마이너 트로피와 영예를 거의 독점적으로 휘감게 된다. 그 사이 군의 만행은 거의 잊혔다. 경찰 덕분에.
오늘날 암울했던 시절은 일단 물러갔다. 지금 대통령은 휴.. 국민이 직접 뽑는다. 국민은 더 이상 군인도 경찰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경찰에 끌려가 맞았다는 뉴스는 없지만 시민에게 매 맞는 경찰이라는 기사는 흔해졌다. 경찰의 인권을 부르짖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경찰이다. 이가 빠졌다고 발톱마저 빠진 것은 아니다. 유리창 사이에 놓인 마네킹 신세여서 일거수일투족이 너튜부에 까발려지지만 어디까지나 보이는 대목일 뿐. 경찰 내부는 지금도 어둡고 음산하다. 음흉함은 한층 진화하여 성장 중이랄까.
경찰 안쪽은 여전히 폭력적이다. 물론 몽둥이로 팬다거나 물을 먹이지 않는다. 다만 힘을 가진 경찰이 힘이 없는 경찰을 억압하고 입을 막는다. 그들은 힘없는 이를 워드프로세서 한 장으로 보내버린다. 부당도 불합리도 그렇게 문서 한 장에 정당과 합리가 된다.
인터넷이 상용된 이래, 경찰의 감찰은 뺑이 치지 않고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글을 올리는 이들의 뒤를 캐고, 털고, 회유하고, 여론을 형성하고 조지면 됐으니까. 검찰에 소환되면 모두 범죄인 되듯, 감찰에 소환되면 모두 징계인이 된다. 이들의 차이라면 점 하나.
현장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왔다. 빨갱이 잡으면 승진시켜준다고 하니까. 그래서 때리고 전기를 흘리며 정권에 모테나시** 해왔다. 21세기에는 날밤 까기, 사고, 폭행, 끔찍함을 견디며 시민에게 모테나시를 하고 있다. 시대는 다르지만 결과는 같다. 고통과 소외.
도처에 김구 선생님의 흉상이 놓여있다. 나는 경찰이 그분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남영동을 시민에게 돌려주고 국민과의 대화를 아무리 해도 아나킨 폴리스 워커는 시스를 포기 못하고 있는데 오비완 김구 캐노비***를 맞상대할 수 있겠는가 해서다.
오늘은 5월 18일, 40년 전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국민들이 국가폭력에 으스러져 갔던 날이었음을 안다. 당시 군부의 폭력에서 시민 목숨을 지키려다 고초를 겪었던 전남도경 안병하 치안감과 경찰관들이 사면을 받아 이제야 명예회복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늦게라도 잘못을 바로 잡은 건 옳다. 하지만 문민정부 이래 30년이 지나고서야 경찰의 표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니 실소를 금할 길 없는 것이다. 허나 대한민국 경찰은 여전히 털어놓아야 할 게 많으며 덕분에 5월 18일 오늘도 현장은 고단하다.
* 국가 : 여기서 국가란 영화 ‘변호인’의 차동영 경감의 법정 대사를 떠올리면 된다.
** 모떼나시(持て成し) : 손님을 알아서 극진히 대접한다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에 방문했을 때, 아베 총리의 호들갑을 떠올리면 된다.
*** 아나킨과 오비완 : 영화 스타워즈의 주인공들이다. 아나킨은 훗날 다스 베이더가 되며, 오비완은 아나킨의 제다이 때의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