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상반기. 복직 후 1년 하고도 몇 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몇 차례 소규모 인사이동이 있었고 나는 이 부서에서 터줏대감이 되었다.
무리한 상황이나 예의 없는 사람과 부딪치면 두 번은 참아도 세 번째는 꽤 강단 있게 처신하며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었다. 일 때문에 고민은 해도 사람 때문에 고민하는 상황은 아니라 조직생활을 잘해나가는 셈이었다.
과장님은 쉽지 않았지만 능력 있고 합리적인 사람이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가끔 짜증 부릴 때는 분위기 살벌해졌다. 나는 최대한 주도면밀하게 일처리하고 기분 나쁜 소리 듣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리 합리적인 사람이라도 가끔 실수한다. 너무 부당하다 싶을 때는 '나 지금 기분 나쁘다'는 티를 내며 나를 방어했다.
규정과 양심에 따라 일하고 간부라 하더라도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서는 맞서는 것. 그게 결국 나를 보호하고 길게 보면 그 사람과의 관계도 바람직하게 유지하는 길이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으려고 애썼다.
사람 때문에 조직을 떠나는 것은 제고해야 한다. 내가 사직을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과 조직에 대한 좀 더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연말 북새통에 법률 개정안이 통과되어 과업을 달성하면서 느꼈던 희열도 약발이 다하던 시기였다.
사람이 뭐라도 일을 하면 되는 거지 꼭 조직에 속해서 하나 싶었다.
그 무렵 조직의 본질을 다시 한번 깨닫는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예산과 관련하여 불미스러운 상황을 인지했는데 누구 하나 책임 질 사람이 없었다.
사업단체는 지출과 관련하여 구두 승인받았다고 난리였고 그 사건의 빌미를 우리 부서가 제공했다는 이유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가 있었기에 그 사람에게 전적으로 책임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중간에서 단체 대표의 온갖 협박성 항의를 모두 들어야 했다.
나는 최대한 규정을 어기지 않으면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으나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잘못하면 내가 다 뒤집어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간부들 앞에서 사건의 전말을 모두 밝혔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조직의 본질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내가 조직에서 빠져나가려는 이유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조직의 한계
자신이 살기 위해 화려한 언변으로 상대에게 덫을 놓는 야비함
자신의 허물은 감추고 상대의 잘못은 최대한 부각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비굴함
누구나 처음 조직의 일원이 되었을 때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승진하고 연관되는 사람이 많을수록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사건은 더 많아지게 마련이다.
평소에 잘 지내던 사람도 나와 이해관계가 배치되면 자신을 보호하다가 결국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릴 수 있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조직이 사람을 나쁘게 만드는 걸까? 사람이 조직을 나쁘게 만드는 걸까?
일은 하다 보면 불미스러운 일은 생기게 마련이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책임을 지고 좌천되느냐, 미꾸라지처럼 노련하게 그 책임에서 빠져나오느냐?
빠져나온 사람은 승승장구하고,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난 사람은 처음에는 멋져 보이지만 결국은 바보가 된다.
그게 조직이다. 그게 조직인의 한계이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이왕 하는 조직생활, 승승장구하기 위해 미꾸라지 같은 인간이 될 자신이 없었고, 또 그렇게 된다 해도 미꾸라지가 된 나를 용납할 자신이 없었다.
조직이 나쁘지, 사람이 나쁘겠는가?
역시 나는 야비하게 살며 쭉쭉 승진하긴 글렀다
조직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다시 조직에 거부감을 느낀다.
정해진 출퇴근 시간, 당직과 복무점검
해야만 하는 것들, 해서는 안 되는 것들
미미한 현실 변화와 의미 없는 페이퍼들
예의 없고 야비한 사람들, 그러다 한 달에 한 번씩 나오는 월급
이 기간 난 개인적 일에 더 집중한다
독서와 영어 청취, 운동, 역시 난 조직은 아니었어.
그 2%의 의구심이 점차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무관 승진 교육대상자 선발을 앞두고 그간 업무실적을 제출하게 된다.
승진을 앞두면 좀 달라질까 싶기도 했지만
아니었다. 사람 본질이 어디 쉽게 달라지겠는가?
'이러다 승진하겠다. 그땐 정말 제대로 일해야 한다. 조직에 더 얽매이고, 더 많은 책임과 의무가 부여되고 바빠서 다른 모든 기회를 날려버릴지도 모르겠구나.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렇게 내 마음은 다시 혼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