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침대 위 첫 문장
현관문 앞에서 카드키를 한 번 더 확인한다. 얇은 종이 슬리브에 끼워진 카드, 번호가 적힌 작은 스티커, 모서리의 미세한 광택. 문손잡이 아래에 카드를 대면 녹색 불이 짧게 켜진다. 문이 열릴 때 낯선 공기의 결이 먼저 들어온다. 막 세탁한 린넨 냄새와 샴푸의 희미한 잔향, 카펫에 눌린 바퀴 자국. 캐리어는 익숙하게 벽 쪽에 세워 두고, 얇은 책은 늘 하던 대로 침대 머리맡 협탁 위에 올려둔다. 출장이 잦아 이런 순서가 내 루틴이 되었다. 도착-정리-첫 문장 읽기. 오늘 밤의 중심을 먼저 내려놓는 일이다.
스위치를 몇 번 눌러 조도를 맞춘다.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은 가운데. 커튼을 반쯤만 닫으면 바깥의 불빛이 얇게 방 안을 가로지른다. 길게 늘어진 빛의 모서리가 책 표지 위에 닿는다. 침대는 집보다 조금 넓고, 베개는 집보다 조금 높다. 낯섦을 세세하게 확인하는 대신, 읽을 자리를 하나 만든다. 의자를 책상 앞으로 당기고, 물 한 병을 오른쪽 끝에, 노트북 어댑터 옆에 연필과 책을 둔다. 회의 자료, 일정표 같은 건 잠시 뒤로. 이 방에서 당장 필요한 건 첫 문장이다. 독서는 언제나 첫 문장에서 시작된다.
표지—차례—첫 단락. 낯선 곳에서의 밤에는 늘 이 순서를 따른다. 표지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며 오늘 하루의 속도를 맞춘다. 차례를 넘기며 어디까지 왔는지, 어디로 갈 건지 가볍게만 확인한다. 그리고 첫 단락. 오늘은 많이 읽지 않는다. 길게 이해하지도 않는다. 대신 시작을 정확히 한다. 시작이 정확하면 낯선 방도 익숙한 듯한 공기가 느껴진다.
첫 문장을 소리 없이 따라 읽는다. 종이의 냉기가 손끝에서 천천히 사라진다. 단어들이 낯선 침대의 높이를 살짝 낮춰 준다. 집에서보다 높게 쌓인 베개가 목 뒤를 지나치게 받치지 않도록, 문장 사이사이에 고개를 조금씩 조정한다. 미술관에서 배웠던 방식이 여기서도 통한다. 경계를 먼저 보고, 그다음에 내용을 보는 법. 침대의 경계, 빛의 경계, 책의 여백. 경계가 선명해지면 내용은 덜 낯설다.
책갈피가 필요해져 카드키 슬리브를 꺼낸다. 체크인할 때 받았던 그 얇은 종이. 오늘은 이것을 책 사이에 끼워 넣는다. 숙소가 바뀔 때마다 다른 슬리브가 끼워진다. 오늘은 새하얀 배경에 숙소 로고가 선명히 드러난 모양이다.
페이지 여백에 점 하나를 찍는다. 오늘의 단어를 고르기 전, 늘 먼저 점 하나를 찍는 습관. 익숙한 습관은 낯선 공간에서의 책 읽기도 익숙하게 만드는 효과를 준다. ‘자리.’ 오늘의 단어는 자리로 하자. 가지고 온 자리가 아니라 만들어 넣는 자리. 침대의 먼저 깔린 흰색 위에, 내 읽기의 얇은 패턴을 한 겹 더 얹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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