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사모님 엔딩
"이따 엄마가 학원으로 꼭 갖다줄게!"
아침에 학교 가기 전 아이와 약속했다.
오늘 필요한 영어책을
미리 온라인으로 주문한다는 걸 깜박했기에
이것만은 꼭 지켜야 했다.
아이는 나를 굳게 믿고
현관문을 나섰다.
먼저 전화를 돌렸다.
대형서점, 동네서점 할 것 없이
출동 가능한 범위 내에는
재고가 없었다.
혹시나 싶어
학원에 문의했는데
여유분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를 어쩌나,
살짝 현기증이 났지만
기적처럼 그나마 가까운 중고서점에
재고가 있다는 확인을 받았다. 오!
열일 제쳐두고
운전대를 잡았다.
서점까지 가는 초행길
거의 영화 '스피드'를 찍듯
정해진 시간까지 컴백을 목표로
다급하게 달렸다.
책 실물과 조우하고
부리나케 다시 운전해
수업 시작 전
아이 손에 쥐여 주었다.
으핫 해냈다!
진작 챙겼더라면
굳이 겪지 않아도 됐을 소란이
번외로 추가됐지만,
약속을 지켰다는 생각에
흡사 개선장군이 된 것처럼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나는 책을 사러 간 게 아니었다.
이 뿌듯함을 만나러 간 거였다.
이만하면 나름 균형잡힌
위기와 극복의 스토리라인 아닌가.
집에 돌아와
한숨 돌리고 있으니
가만히 있는
화분에 눈길이 갔다.
얼마 전에 만들어온 테라리움 속
보스톤고사리 잎이
조금씩 타들어가고 있었다.
어머나,
과습인가 싶어
얼른 유리 뚜껑을 열고
거실창 방향으로
바람이 잘 통하도록 자리를 옮겼다.
그 순간 창을 넘어온 바람이 살랑,
내 머리카락을 스치며
귓속말을 했다.
나 이렇게
자잘하지만
믿을 수 없이 중요하고
더없이 소중한 일상에
둘러싸여 있다고.
어디든 구석구석
내 손길을 기다린다고.
봉준호 감독은 말했다.
"영화는 디테일이다."
사모님은 덧붙인다.
"일상도 디테일이다."
조금 소란했고
살짝 웃었고
꽤 다정했던 하루.
여운과 함께
오늘도 무사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