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뢰를 되살리기

by 최초록별

심리상담선생님이 말해주셨던 것 중에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애기들이 정말 갖고 싶은 게 있을 때요. 갖고 싶은 걸 말했는데, 그런데도 갖지 못하면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아시나요?”


- 글쎄요, 갖고 싶다고 조르지 않을까요?


“졸라보고 설명해봐도 갖지 못하면요?”


- 음… 포기하나요?


“아니요.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갖고 싶지 않은 척해요. 몇 번을 다시 물어도 별로 안 갖고 싶다고, 필요 없다고 말하죠.”


- 헉, 그건 너무 슬픈데…


“그쵸? 자신을 속이는 거예요. 상처받고 실망할까 봐. 사회에서 애어른 같다고 불리는 모습이죠? 이 친구들이 다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게 하려면 어른들이 계속해서 신뢰를 줘야 해요. 표현해도 괜찮다 표현하면 가질 수 있다는 걸 마음 깊이 심어줘야 하는데, 이건 이전보다 몹시 어려운 일이에요.”


- 정말 그렇겠네요. 한 번 무너진 신뢰는 회복하기 힘드니까…


“맞아요. 잘 회복되지 않아요. 만약 이 애어른 친구들이 그대로 어른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선생님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렇구나, 그게 저네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갖고 싶은 게 없는 아이였다. 갖고 싶은 것들은 꼭 필요한 것들은 아니었고,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초등학교 교내 과학경진대회가 열릴 때면 특별한 재료가 필요하지 않은 글짓기, 상상화그리기, 표어그리기를 골랐다. 과학상자, 고무동력기, 로켓은 키트가 필요했기 때문에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대신 대회 날마다 친구들의 제작과정을 곁눈질했다. 나는 그중에서 과학 상자가 너무나도 해보고 싶었다.


얘기해볼까, 말까 몇천 번은 고민했던 것 같다. 그날은 엄마와 길을 걷는 길에, 곧 열릴 과학 경시대회 얘기를 나눴다. 나는 과학 상자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가 호응했다. ‘맞아, 과학상자도 있구나. 그건 많이 비싸더라. 해보고 싶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그건 내가 상 받을 수 있을지 잘 모르니까. 그림은 내가 매년 상 타잖아. 상 받으려면 안전하게 상상화그리기가 나아. 돈도 내고 상 못 타면 손해니까.’ 그렇게 말했다. 마지막 6학년 때까지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항상 잘해왔던 것들을 골랐기 때문에 어쩌면 잘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은 졸업하기 전까지 시도해보지 못했다.


과학상자는 MP3로, MP3는 악기로, 악기가 자율형 사ㆍ공립 고등학교가 되는 건 자연스러웠다. 나의 태도는 한결같이 애어른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성인이 되었을 때, 나는 어른애가 되어버렸다. 몸만 어른이고 아직 마음은 ‘애어른’밖에 되지 못하는 ‘어른애’. 어른인데 어른이 되지 못하고, 그저 어른인 척 구는 어린애가 나다. 갖고 싶어도 갖고 싶지 않은 척, 하고 싶어도 하고 싶지 않은 척, 가고 싶어도 가고 싶지 않은 척하며 사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그러던 내가 무려 스키장에 갔다. 2022년 초 겨울에. 내 손으로 직접 예약해서 강원도 스키장에 도착했다.

친구가 퇴사한 나에게 짧은 국내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는데, 문득 스키장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 나에게 우주만큼 먼 스포츠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내가 스키라니. 난 스키를 한 번도 타본 적 없다. 그저 이미지로 남아 있을 뿐이다. 드라마나 예능에서 봤던 하얀 설산… 주인공이 입던 두꺼운 스키복… 뻥 뚫려있는 리프트… 친구들이 겨울마다 가자고 말했던 곳… 학교 게시판에 붙어있던 스키 교실 모집안내문… 어렸을 수업 가격에 놀랐던…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할 가격이었지만, 지금 지불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도 예매하기 전까지도 몇 번을 망설였나 모른다. 나는 한 번도 배운 적 없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 이건 어디 써먹기도 힘든데, 완전히 놀려고 가는 건데 이렇게 비싼 돈을 써도 돼? 비싼 돈 주고 왔는데 막상 안 맞아서 가서 아무것도 못 하면 어떡해? 걱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나는 내 손으로 했던 크고 작은 도전을 떠올렸다. 처음 했어도 무사히 끝마쳤던 것들을 생각했다. 돈도 충분하다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직장에서 벌어놓은 돈으로는 스키장을 가고, 리조트에서 1박 2일 머물 정도는 충분했다. 스키를 타러 가기로 했다.



스키장은 모든 게 다 처음이었다. 새벽에 셔틀버스를 타는 것도, 도착한 매표소에서 예약 표를 수령하는 것도, 스키복과 장비를 따로 빌리는 것도, 갈아입고 갈아 신는 것도 전부 생소했다. 신발에 스키복을 넣어야 할지 빼야 할지 렌트샵 직원에게 물어보고, 신발을 신는 것도 스틱을 고르는 것도 전부 물어물어 해결했다. 신발을 스키에 고정해야할 때는 유튜브에 검색했고, 락커를 사용할 때는 익숙지 않아 동전을 먹혔다. 작은 실수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렇게 익숙하지 않은 것에 둘러쌓여 있는 게 오랜만이구나 싶어질 정도였다.


드디어 모든 장비를 착용했으니, 스키를 탈 차롄데… 가장 큰 산이 남아 있었다. 친구는 예전에 보드만 타봐서 스키를 알려줄 수가 없었다. 스키 강습은 비싸서 예약하지 않았다.


결국 유튜브를 틀었다. 내 학습은 너에게 맡길게, 넌 무료니까. 유튜브가 알려주는 대로 넘어져서 일어나는 연습부터 시작했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주 엿됐다고 생각했다. 5분을 끙끙거리다가 겨우 일어났다. 도대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서 다시 한번 해보자고 넘어졌는데 이전처럼 일어날 수가 없었다. 설산에 앉은 지 10분 정도 지났다. 스키복 아래의 엉덩이가 냉동되기 시작해서 차가워졌다. 15분째, 주변 사람들이 도대체 내가 왜 눈 위에 앉아서 유튜브를 보는 건지 궁금했는지 자꾸 기웃거렸다. 20분째, 스키 강습을 받는 애기들이 내 곁에 나타났다. 귀여운 애기들이 내 옆에서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풀썩 쓰러졌다가 후다닥 일어났다. 아주 재빠른 솜씨였다. 너희는 몸이 아주 가볍구나. 나는 엉덩이가 무겁고 시려워. 집에 가고 싶었다. 울고 싶었다. 내가 스키 강습 9만원이 아까워서 이렇게 엉덩이가 얼어붙고 마는구나. 결국 돈이 사람 잡아먹는구나. 한탄해봤지만 이미 늦었다.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서 일어나볼까 싶었다. 좀처럼 면이 서지 않았다. 그 생각하면서 몸을 뒤트니까 얼떨결에 일어서졌다. 이게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넘어져서 제대로 배웠는지는 확인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간 정말 하루를 앉아서 사람 구경만 하게 될 테니까. 어차피 내려올 때 넘어지면 그때 또 시도하지 뭐.


내가 겨우 일어서고 나니, 친구는 이미 설산을 2번이나 타고 내려온 상태였다. 친구는 이제 스키를 탈 준비가 됐냐고 물었고, 나는 A자 자세를 더 연습해야된다고 했다. 친구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여긴 언덕이 아녀서 연습하기도 힘들 거야, 일단 위에 올라가서 연습하는 건 어때? 스키도 금방 익숙해질 거 같은데. 친구는 내가 25분을 전부 엉덩이 냉동에만 소요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여기서 구르면 우린 다시는 스키장에 올 수 없게 될 것임을 경고했다. 친구는 다시 리프트를 탔다.


친구를 보내고 스키로 움직이는 걸 연습해보는데… 1분도 지나지 않아 인정했다. 여기서는 유튜브가 말한 제동이 제대로 걸리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친구가 3번째 내려오자마자 같이 올라가자고 했다. 뭐 어떻게 되겠지.


리프트를 타고 초보자 코스 꼭대기에 올라가서, 친구와 몇 마디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아 첫발을 밀었다. 나는 ‘해볼게!’를 외친 다음 그대로 하강했다. 비자발적이었다. A자 제동은 다 구라가 따로 없었다. 나는 그대로 영원히 직진하다 못해 하직할 뻔했으나, 마지막에 스키 경로를 좌측으로 크게 돌려 속도를 줄일 수 있었다. 다행이야, 운전은 배워놔서. 뒤쫓아온 친구가 연신 따봉을 날렸다. 얼떨결에 제동 하나도 없이 내려와서 갑자기 커브하는, 속도를 즐길 줄 아는 멋진 놈이 되어 있었다.


‘금방 배우겠는데…?’


2번째, 초심자의 운이란 통하지 않았고 나는 중간에 넘어졌다. 넘어졌는데 뭐, 그렇게 아프진 않았다. 일어나는 것도 곧잘 일어났다. 제동도 걸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가속이 크게 붙어 있을 때도 제동을 걸 수 있도록 연습해야겠다 싶었다.


3번째, A자 제동을 연습하며 코스를 느릿하게 내려갔다. 주변에 어린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아빠의 두 손을 잡은 채로 천천히 배워나가는 아이들, 선생님에게 1대 1로 스키를 배우는 아이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다들 어렸을 때 스포츠와 예술을 즐기는 법을 배우는구나 싶었다. 멋있고 보기 좋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 자신이 대견해졌다. 내 힘으로 이걸 배우러 왔다는 사실이 갑자기 와 닿았다. 그때 못했어도, 지금 할 수 있네. 내가 하고 싶은 거 내가 하게 해주면 되는구나. 갑자기 용기가 샘솟았다.


‘나는 내가 벌어, 내가 여유 있을 때, 내가 하고 싶은 지금, 용감하게 여기 왔다!’


나는 마침내 그날 초보 코스에서 원하는대로 타고 원하는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속도도 조절할 수 있었고, 방향 전환도 할 수 있었고, 더 이상 넘어지지 않았고, 일부러 앉아도 금방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스키 여행은 계획한 것 이상으로 아주 멋졌고, 성공적이었다.


예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네가 26살에는, 그 해가 시작하는 겨울에는, 네가 못 본 척했던 모집안내문 속 그것을,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스키를 내 발로 타러 갔다고. 강습은 비싸서 못했는데, 그런 거 없어도 나 다치지도 않고 8번이나 타고 내려왔다고.


그렇게 말한 뒤에는, 어린 나에게 새끼손가락을 걸어주고 싶다. 내가 나에게 신뢰를 줄 수 있도록. 어른으로 자랄 수 있도록 아주 단단하고 꽉 걸어 놓은 채로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애써 원하지 않은 척했던 것들을 하나씩 손에 넣으며 자랄게, 꼭 그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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