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14 언저리의 기록
분신 같은 후배들이 있다.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고, 표정만 봐도 다음 행동이 예측되는 사람들. 지난 프로그램에서 마지막 공연 촬영을 준비하며 부쩍 친해졌으니 가까워진 지 이제 100일 정도 된 셈이지만, 같이 얘기하고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는 게 하도 재밌다 보니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것 같다.
마라톤 이야기는 얼마 전, 소고기를 구워 먹다가 나왔다. 이제 팀은 서로 다르지만 촬영 시기가 비슷하다 보니 마음의 준비를 함께하는 중인데, 체력을 위해 운동도 열심히 하는 김에 마무리를 지어 보자는 취지였다. 정작 나는 운만 띄운 뒤 잊고 있었는데. 어느새 행동대장이 한강 나이트워크를 찾았고, 동조대장이 따라 신청하면서 우리의 10km 행군은 캘린더에 박제되었다.
양화대교 남단에서 시작하여 한강 남쪽을 걷고, 마포대교를 건너 한강 북쪽을 걸은 뒤 다시 양화대교를 건너 돌아오는 루트. 선유도역에 내리는 바람에 조금 늦었지만, 여유 있게 짐도 맡기고 사진도 찍은 후 출발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나눈 재밌는 이야기들.
조금 버거웠던 일주일이라 기분 좋게 걸을 수 있을지 정말 많이 걱정했는데. 기대가 적었어서 그런가, 오히려 훨씬 즐겁고 상쾌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우산 쓰고 걸어도 다 젖으면 어쩌지, 걱정했지만 거짓말처럼 날이 개어 멋진 노을과 야경이 펼쳐진 것처럼, 단 한 명도 힘들어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순삭 되듯 사라진 것이 마치 마법 같았다. 인생 첫 걷기 대회라는 사실 말고도, 한강 나이트워크를 잊지 못할 이유가 이렇게 생긴다.
미나리 삼겹살과 와인, 그리고 국밥으로 이어지는 뒤풀이 메뉴는 우리가 처음 함께 놀았던 여름과 똑같았다. 의도한 건 아닌데 이렇게 된 것이 재밌어서 수미상관이냐며 조금 웃은 밤.
수없이 많은 저녁을 함께했지만, 이 날이 유독 기억날 것 같은 이유는 한없이 작아진 자존감을 끌어올려 준 질문들 때문일 것이다. 회사에서 기분 좋았던 순간이 언제야? 라는 물음에, 뭐야 자존감 높이는 시간이야? 라고 웃으며 반응했지만 정말 자존감이 올라갔거든. 시사 때 박수받은 일, 처음 맡은 공연 롤을 해낸 일, 그리고 선배나 후배가 지나가듯 건네주었던 토닥이는 말을 들은 일. 모두가 각자의 기분 좋았던 순간을 말했고, 말을 뱉으면서 한 번, 거봐 너 이렇게 잘 한다니까, 라는 반응을 들으며 또 한 번 단단해졌다. 하긴 그렇네. 이렇게 좋았던 시간들이 많았는데. 내가 해낸 일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뭘 그렇게 걱정해. 뭘 그렇게 불안해해. 처음 하는 형태의 프로그램이지만 어떻게든 잘 해내고야 말 거다. 불안한 건 새로워서가 아니라 유효한 노력을 덜 하고 있어서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정말 뿌듯하고 멋진 경험이었다는 소회는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우수수 쏟아지는 카톡을 읽으며 나도 어제가 무척 행복했었다고, 지난 일주일 참 밀도 있게 보냈다고 생각하는 걸 보니 행복감은 역시 말을 통해 전염되는 것이 맞는 모양이다.
우리 후배들처럼, 언제나 만족감을 입 밖으로 표현하는 사람이고 싶다. 별 것 아닌 성취 같아도 멋지게 포장해서 긍정 에너지를 채워 올리는 사람. 그리하여 주변 사람들에게도 행복감을 전염시키는 자존감 충전기 같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