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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실 Jul 26. 2023

HOME, 그 중요한 거점에 대하여

내 품에 둥지를 틀어 봐

 


부끄럽게도 나는 30대 초반까지 보증금 300에 월세 30만 원의 원룸에서 살았다. 여기에 왜 부끄럽게라는 말을 붙였냐 하면, 그 나이 먹도록 전셋집이나 네 명의로 된 집 하나 구하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냈다는 것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나는 그 어떤 계약 형태와 넓이가 되었던 자신이 누워 잠을 잘 수 있는 독립적인 공간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존중한다. 그것이 한편 남짓한 고시원 한 칸일지언정 그것도 다달이 내가 피 흘리듯 번 돈으로 연명해 나가는 소중한 곳 아닌가. 부끄럽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 시절의 나는 꽤 부지런히 일을 했지만 돈이라는 것을 모으지 못했기 때문에 남들 다 가는 투룸도 가지 못하고 외풍이 심한 그 원룸에서 거의 10년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집이라는 것에 대해서 큰 욕심이 없었다. 집은 예쁘게 꾸며서 나만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에 욕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누군가와 알콩달콩 가정을 꾸리는 것은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덕분에 내 집은 늘 공허했다. 보통 이런 표현을 하면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있고 바퀴벌레와 동고동락하는 그런 드라마에 나오는 집을 상상하고는 하는데 그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나는 내 공간을 그렇게 두기엔 기관지가 약했고 조금이라도 먼지가 쌓여 있으면 내장기관을 확인할 것처럼 기침을 해 대기에 그 경지까지는 거의 불가능했다.(이런 사람이 고양이 털이 공처럼 굴러가는 건 왜 아무렇지 않은지 정말 미스터리하다. )



공허, 그 단어가 주는 풍경은 누군가에게 꽤 멀쩡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나의 그 작은방은 하루가 멀다 하고 물건을 사들이고 버리는 일을 하던 몹쓸 버릇 때문에 제법 깨끗한 상태를 유지했다. 아마 고양이 털이 아니었다면, 스크래처 대신으로 썼던 3분의 1쯤 없어진 싱크대 짝이 아니었다면 멀쩡하고 깨끗한 집이라고 생각할 듯했다. 그 방 안에서 살아가던 나는 미래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 집의 주인인 내가 (물론 내 것이 아닌 집 주인 이모님의 것이었지만) 공허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그 방 안에서 마치 우주를 헤매듯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내 머리 위에 있는 두꺼운 유리천장을 뚫어 보려 별의별 짓을 다 해가면서 말이다.     



그 당시의 나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내 직장은 하루 종일 전화를 받고 그 전화기 너머의 사람들의 불만을 들어주는 감정 노동자였고 그곳에서 교육받은 지식 말고는 다른 업무를 할 줄은커녕 할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직장에서 무엇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을까 궁금하기 시작한 것은 그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로 코피를 자주 흘리고 몸이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아마 내 우울증의 신체화 증상의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이상하게 누군가에게 발로 밟히면서 맞은 거처럼 하루 종일 온몸이 화끈거리고 묵직하게 아픈 상태로 두통을 달고 살았다. 아마 그때 먹은 진통제의 양이 내가 독립하기 전에 먹었던 모든 약의 양보다 많지 않을까? 진짜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1년에 한 번 하는 회사 건강 검진이 두려웠던 것도 그때였다. 이대로는 진짜 내 수명을 한도만큼 쓰지도 못하고 인생 조기종영하고 골로 가겠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뭔가를 했던 건 아니다. 직종을 바꾸기 위해 뭐든 배우기 시작한 건 그 일을 무려 7년이나 하고 난 이후부터였다. 


세상에, 7년이나 했다. 


심지어 그동안 나는 팀장이나 매니저나 슈퍼바이저 같은 직급 같은 건 달아보지도 못하고 쭉 상담원이라는 이름으로 전화와 씨름을 했다. 얼마나 지겨운 인생인가? 게다가 정말 치명적이게도 내 월급은 그 자리에서 뱅뱅 맴도는 잠자리 같았다. 고작 10만 원 안팎으로 달라진 월급을 들고서, 그것도 이직을 해봤자 크게 달라지지 않는 그 월급을 들고서 나는 그 집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 벗어날 생각을 못 했다.


  

이리저리 힘들다 보니 그때는 정신도 온전하지 못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멀쩡하게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베개를 베고 일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전날 종류를 가리지 않고 엄청 마셔댄 술 때문에 집안 곳곳에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 날이 있었고 혹은 폭식으로 인한 구토로 집안 온통 토사물 냄새가 나던 아침도 있었다. 혹은 지금 생각해 보면 꽤 끔찍하게도 그 당시 왼쪽 팔뚝이 너덜너덜하게 자해를 할 때였으니 피 냄새가 진동하는 공기 속이나 심할 때는 얕은 피 웅덩이 속에서 잠이 깨곤 그랬다. 참으로 다이나믹한 아침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쯤 되니까 누군가는 아침에 눈을 뜨기 싫다고 하던데 그건 뭐 전날 잠들기 전에 생각했을 거고 아침에  잠이 깨고 눈을 뜰 기 전 딱 그 사이에 코 끝에 느껴지는 냄새 혹은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으로 어제의 사태를 짐작하며 눈을 뜨기 싫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손끝에 달라붙는 끈적하게 응고된 핏덩어리는 느낌이 썩 좋지 못하다. 하지만 나는 출근을 해야 했고 다행히 그날이 휴일이라면 눈을 떠 멍하니 빨간 벽돌에 가려진 창밖을 보다가 한 뼘 정도 들어오는 햇빛을 느끼며 일어나 나의 집을 정리했다. 제일 힘든 건 아침 시간에 그렇게 집을 정리하고 시골로 모친을 보러 가야 할 때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 것이 제일 힘들다고 하지 않는가.



그 시절 나는 술로, 구토로, 피로 얼룩졌단 내 집을 지키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안의 나는 길에 나가 앉아 있어도 상관이 없을 만큼 인생에 있어 크게 좋고 싫음이 없는 상태였는데 환경이라는 놈은 나를 그렇게 두지 않았다. 나는 꽤 생각지 못한 사고를 쳐서 모친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딸이었고 가족을 돌보지 않고 결국 백년가약을 갈라버린 부친에겐 그 모든 것을 넘겨주는 이해심 많은 딸이었다. 내 내면을 돌봐줄 사람은 그 당시 없었다. 그래서 더 나는 내 집이 중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20대 초반 독립을 하면서 본가는 내가 돌아갈 곳이 아니었다. 나는 여기가 아니면 정말 갈 곳이 없기 때문에 만일 이 작은방이 사라진다면 세상에서 사라져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냄새를 빼고 핏자국을 지우고 청소를 하고 물건을 들여놓았다. 그때 내 심보도 고약했었는지 초반에 모친이 챙겨준 모든 짐들을 시간을 들여 전부 버리고 내가 스스로 산 짐들을 들여놓았다. 물론 챙겨준 짐보다 훨씬 값싸고 품질이 좋지 않았지만 그 고약한 심보가 내 집에 그 흔적을 남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저 가지고 버리는 반복 행위에 대한 충동을 조절할 수 없었던 내가 했던 한 때문의 에피소드 같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아깝긴 하다. 아무 생각 없이 버린 그 슈퍼싱글 침대가 거의 200만 원 짜리였는데..)



좋은 기억만 남기려고 지인들도 많이 초대했던 것 같다. 집이 작고 볼품없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행운이게도 내 주변에 집이 좋고 나쁨에 대해 논하며 나를 끌어내릴 그런 쓰레기들은 없었다. 지금도 그 사람들 중 일부는 인연을 이어가고 우리를 그때 이야기를 꽤 많이 한다. 세월이 기억을 추억으로 둔갑시킨 것인지 그럴 때면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린 즐거웠고 즐거웠던 일만 있었으며 즐거웠던 기억에 즐거운 웃음소리만 냈다. 성공이었다. 나는 그때의 내 집을 행복한 기억들로 채우는 것에 성공을 했다. 그리고 지금의 내 파트너와 작지만 소소하게 신혼생활을 그곳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지금은 두 사람이 살기엔 꽤 넓은(라지만 고양이 5마리와 사니까 그리 넓진 않은) 깨끗한 새 집에 살고 있으면서 좋은 기억을 채워나가고 있다. 쫓기듯 이사 갔던 쥐와 바퀴벌레가 나오던 반지하 수준의 산동네 집, 베란다가 없어서 세탁실에 고양이 화장실과 세탁기를 나란히 놓고 써야 해서 빨래를 할 때마다 곡예 아닌 곡예를 해야 했던 원룸, 햇볕이 가득 들어와서 여름에 에어컨이 달린 안방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지만 빨래 하나는 기똥차게 잘 말랐던 엘리베이터 없던 5층 투룸을 거쳐 이사 온 조용한 이 동네에서도 여전히 나는 이곳이 없어지면 세상에서 없어질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죽기 전까지 그럴 것이고 아마 그건 내 파트너도 마찬가지 아닐까? (조금 전 회사에 가져갈 라벨지 하나 못 뽑아서 내 손을 빌리는 것을 보면 심각하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집에선 매달 대출금을 막느라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것 말고는 불행한 일은 아직까진 없다.     


전화를 받으며 코피가 흐르는 얼굴을 부여잡고 화장실로 달려가던 그 시절의 나는 지금 집에서 일도 하고 글도 쓰고 고양이들과 햇볕에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집은 여전히 내 거점이지만 조금 느긋해졌고 따뜻한 공기가 채워졌다. 공허가 물러간 자리에는 고양이 앞발처럼 보송하고 말랑한 여유가 내밀어졌고 등을 쓰다듬으면 나직이 울리는 그 울음소리에 나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변덕쟁이인 내가 매일 살아가는 이유를 찾을 때 꽤 자주 그 웨이팅에 들어와 있는 것 중 하나인 이 멋진 책임감을 나는 사랑한다. 


이곳을 나갔을 때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움직이게 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이 “둥지”의 오늘 밤도 이루마의 피아노 소리와 함께 밤이 깊어 간다.      


    

달콤하고, 소란스러운 고양이의 그르릉 소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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