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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실 Aug 27. 2023

나의 의젓한 고양이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내 고양이들을 보낸 기억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죽은 사람만 낼 수 있는 그 특유의 차갑고 딱딱한 감촉에 여주인공이 놀라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죽은 사람의 손을 잡아 본 적은 없지만 제대로 환기 시설이 이루어지지 않는 야외 화장장이 만들어 내는 그 특유의 냄새는 맡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죽음의 냄새라고 하기엔 뭔가 아늑하고 고소한 냄새였다. 이렇게 표현하면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지만 13살쯤의 나는 그렇게 느꼈다.



어디선가 조용히 작은 종소리가 울릴 것 같은 냄새였다.



그리고 나서 촉감으로 와 닿는 죽음이란 것을 마주한 때는 나의 고양이들이 지구별의 소풍을 마치고 고양이 별로 돌아가는 때였다. 당시 나는 마치 건기를 한참 겪고 있는 사막과 같은 상태라 내 고양이들의 죽음을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고 미화시키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그저 한 생명체가 죽음을 맞이 했다고 생각하기엔 가슴이 너무 시리고 저미듯 아파서 삶을 영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추스르는 꼼수 같은 걸 찾아낸 게 소풍을 끝마치고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고양이와의 인연이 깊은지 나는 벌써 4마리의 고양이를 고양이 별로 보냈다. 제대로 소풍의 마무리를 해 주지 못해서 늘 가슴에 남았던 내 첫 고양이 배추, (배추는 치즈 얼룩이 묻어있는 예쁜 수컷 고양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치즈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우리 집에 와서 있었던 3일의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사랑을 주고 간 작은 고양이 탄이,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3번의 여름은 조금 버거웠던 뜨거운 삼둥이 밥이, 그리고 나에겐 과분한, 너무 의젓하고 기특해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내 아들.  가끔 하늘에 무지개가 떠서 내가 그것을 볼 수 있는 날이면 고양이 별이 진짜 있을까 하고 그 너머를 한참 바라본다 .



배추는 잘 지낼까? 그렇게 아프게 갔는데 나를 미워하진 않을까? 
탄이는 이제 많이 컸을까? 지구별에 벌써 와서 좋은 집사는 만났을까?
아들은 의젓하고 멋지고 똑똑한 고양이니까
목소리 큰 걸 이용 해서 고양이 별 어느 구역 구청장쯤은 하고 있지 않을까?
밥이는 아들한테 맨날 혼나고 있진 않을까?
예쁜 여자친구는 생겼을까?



참 쓸데없고 푹 젖은 생각이지만 종종 이런 생각이라도 해야 나는 버티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만 하는 게 아니지, 입으로 뱉어서 내 파트너와 종종 이야기하곤 한다. 어쩌면 꺼내기 힘든 이야기다. 사후세계라는 인간의 기준을 붙인 그런 건조한 단어로 말하기는 싫다. 고양이는 배고픔과 질병만 해결되면 낭만이 있고 여유가 있는 생명체다. 게다가 아름답기까지 하다. 귀엽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햇볕을 받고 나른하게 누워 창 밖을 쳐다보고 있지만 열린 창문 밖으로는 절대 나가려고 하지 않는 그런 우아한 생명체다. 나는 이 우아한 생명체들이 지옥과 천국이라는 양쪽으로만 존재하는 곳에서 이전 생의 업보를 다하고 있다는 재미없는 생각은 하기 싫다. 벌써 배추도 그렇고 탄이도 그렇고 남은 목숨 따위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벌써 다시 행복한 여행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내 아들은 구청장쯤 하면서 조금 바보스러운 동생 밥이를 혼내면서도 챙겨주고 있을지 모른다. 둘 다 걷지 못하고 갔는데 이제 예전의 튼튼한 다리로 신이 나게 뛰어놀고 있을 것이다. 잘 먹지 못했던 맛있는 식사도 제대로 하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없어졌던 뽕알도 생겨났을 수도 있다. 고양이 별 입국 심사 때 척하니 달아 주지 않을까? 지구로 보낼 고양이들도 생겨야 하니까. 아니라고 하기엔 내 새끼들 유전자가 너무 아깝다.



그리고 어쩌면,
모두 나보다 훨씬 좋은 집사를 만나 다시 지구에 있길 바란다. 
나는 무척 간절하게 그것을 바라고 있다. 



비교적 최근이라 나는 내 아들을 보낸 날을 기억한다. 참으로 효자인 게 아들은 병원의 차디찬 입원 케이지가 아닌 우리 집 빈백 위, 파트너가 만들어준 적당한 각도에 폭신하게 기대 따뜻하고 좋아하는 담요에 싸인 채 바삐 움직이는 우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내 품에서 갔다. 그날도 그런게  그때가 내 생일이라 아들은 고맙게도 내 생일이 끝난 다음 날 고양이 별로 출발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주는 물 한 모금을 받아 마시고 직전의 경련도 크게 없이 내 품 안에서 그렇게 시간에 맞춰서 출발했다. 심장을 한쪽 떼어낸 것 같이 한참을 울 거 같았는데 나는 생각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울음을 잘 못 내는 타입이었던 모양이다. 이것도 체력이 있어야 한다고 겨울바람을 정통으로 맞은 것처럼 시리고 아픈 마음에 반비례하는 거지 같은 체력에 제대로 눈물도 뽑아내지 못했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많이 통곡하고 울어야 망자가 좋은 곳으로 간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게 사실이면 아들이 고양이 별로 돌아가는 길은 썩 편하진 않지 않았을까. 퍼스트 클래스 탈 수 있는데 이코노미 타서 엄마를 좀 원망하진 않았을까.



유기동물 보호소에서 더러운 철창 안에서 똑같이 생긴 자신의 누이들을 뒤로하고 척척 걸어 나와 저를 똑바로 보고 야옹 하고 울었단다. 손바닥보다 작은 고양이 두 마리를 너무 큰 케이지에 소중히 넣고 지하철 내리는 곳에서 나를 반기던 그 행복하고 홀린듯한 그날의 파트너 얼굴을 아직도 기억한다. 밥이는 내 파트너의 첫 고양이다. 밥이는 멋진 가면을 쓴 좀 바보 같지만, 무척 착한 히어로 고양이었다. 이제 할머니가 된 우리 집 고명딸인 순덕이 앞에서는 저걸 어따 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철이 없는 오빠였다. 늘 반밖에 주지 않는 간식 캔에 은근슬쩍 눈치를 보며 다른 고양이의 간식을 뺏어 먹다가 나에게 혼나는 그런, (이거 때문에 굉장히 많이 울었다. 그냥 다 줄걸, 그게 뭐가 아깝다고 반만 줬을까 하고.) 열도 많은 파트너에게 열도 많은 밥이는 늘 붙어 있어서 여름엔 좀 버거웠던, 그 시절에 우리를 많이 웃게 해 줬던 고양이. 나도 힘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파트너는 밥이를 잃은 상실감이 아직 가슴 한구석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건식 복막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집에 돌아온 날 케이지를 안고 나는 그 습하고 어두운 집에서 가라앉은 바다처럼 울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나를 올려다보며 우는 밥이는 날이 갈수록 상태가 좋지 않아 졌고 나는 참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밥이가 고양이 별로 출발하는 날 파트너를 혼자 두는 실수를 범했다. 50일 가까이 되는 날 동안 회사를 그만두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저를 수발한다고 고생했던 나에 대한 배려였을까. 급하게 친구의 차를 타고 새벽녘에 들어선 집 현관 옆에 조용히 누워있는 밥이의 몸은 딱딱하고 차가웠다.



내 손에 닿은 것은 죽음의 온도이자 밥이의 부재중 알림 같았다. 



그렇게 사랑이 넘쳤던 아이들이 사라지면 내 생활도 많이 바뀔 줄 알았는데 나는 매정한 엄마인지 그렇게 많이 바뀌지 않았다. 그래도 살아야지, 내 남은 고양이들은 나만 보고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가끔 저 쓸데없고 푹 젖은 생각을 하며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종종 간식 준비하다가 5개만 꺼내도 되는 그릇을 무의식적으로 6개를 꺼낸다든지 아침에 눈을 떠서 이미 떠난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잠을 깬다든지 그런 상황 말이다. 그 찌릿하고 심장 저 너머를 자극하는 기억에 충전되는 눈물샘을 견뎌 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다.  



앞으로 힘들어서 어떻게 할래? 하며 내 주위에서는 이 배웅을 걱정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정서적으로 불안이 넘치는 인간이고 까딱 잘못하다가 나락까지 롤러코스터 마냥 끌려가는 감정을 가진 조울증과 함께하고 있으니까. 그 죽음으로 내 죽음이 다가올 수 있는 유리같은 존재니까. 펫로스 증후군이라며 극한의 상황까지 가는 시간이 나는 무척 빠를 테니까. 나도 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인지라 이 신호들을 마주하는 것을 기다리진 않는다. 앞으로 5번의 배웅을 나가야 하지만 그것이 최대한 늦게 오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도 그 신호조차 참 고양이다워서 이제 간다는 인사를 저렇게 극적으로 하는 걸까 하기도 한다. 운이 좋게도 병원에서 배웅한 적이 없어 이런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 아침에 잠이 깨서 안방을 나서는 내 다리 사이에 와 닿는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 뭉치들이 최대한 내 곁에 오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간식 챙겨 주는 날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라 나는 행복회로를 돌리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여유가 아주 많이 생기고 움직일 수 있는 시간도 길어서 여행 중 헤매고 있는 고양이들을 품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되는 미래도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창밖을 보고 있는 순덕이의 작고 보송보송한 잿빛 뒤통수는 귀엽기만 하다.

가끔 나에게도 조용히 다가와,

새들과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속닥속닥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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