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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실 Jul 17. 2023

왜 상실인가?

크게 생각하지 않는 유쾌한 F코드 여행기



글을 다시 쓰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은 목적지를 빙빙 둘러 찾아가는 것 같았다. 


분명 길을 알고 있음에도, 그 길이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길을 자꾸 찾아 가다가 뱀의 머리와 꼬리사이처럼 돌고 돌아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바보 같은 짓 말이다. 그게 몰라서가 아니라 알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도 나 자신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 도대체 왜? 라는 질문엔 글쎄, 그냥 도망치고 싶은데 도망칠수가 없다고 해야하나. 



글을 쓸까? 하는 질문에 내 지인들은 적어도 두가지 정도의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글을 왜 쓰냐는 부류와 글을 왜 안쓰냐는 부류. 


이 두 부류의 차이는 이전에 내가 토해내듯 써 댔던 글을 읽어 봤느냐 아니냐의 차이일수 있다. 그 부끄러운 글을 보고 감사하게도 아직까지 나는 글을 제법 쓸 줄 아는 주변인이었고 그 재주를 썩히기 아까우니 뭐라도 쓰라는 이야기를 한다.  어쩌면 나는 복 받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외면하고 도망치던 글쓰기라는 것에 대해 나를 제법 긍정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는 범주 안의 넣어주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이건 정말 좋다고 생각한다. 못된 버릇이지만 적어도 나는 그들에게서 지워지지 않아도 되니까. 



사실 정확하게 기억은 안난다. F코드가 찍히고 병원이라는 꽤 합법적인 루트를 통해 내 입에 이미 검색해 본 처방 알약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매일 밤 나의 수면을 책임져 줄 그 많고 많은 약들을 언제부터 만나게 된 것 인지. 부끄럽게도 나는 그 약들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먹기를 거부하며, 혹은 자해의 수단으로 사용하며 술과 약을 삼키며 수 많은 밤을 지새웠다.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 볼에 들러 붙는 대리석, 장판, 아스팔트 등등은 아침마다 나에게 자책과 또 시작되는 자해를 선물하곤 했다. 아침마다 반복되는 그 시간에 엉망인 얼굴로 (이 얼굴은 그냥 볼썽 사납게 부은 얼굴이다. 사실 우울증 환자들이 많이 운다고 다들 알고 있는데 그렇지만도 않다. 적어도 나는 이 검은 개 때문에 울어본 기억이 한 손의 손가락을 넘지 않는다.) 검색했던 그 특정 단어들로 쏟아지는 게시물들을 보고 나는 안도감을 즐겼다. 막혀있는 키워드로는 꼼수를 써가면서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동지들을 찾곤 했다. 이제와서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와서 생각해 보니 궁금한게 생겨서 이다. 



왜 내가 검색한 것들에 대해 누구 하나 시원한 대답을 해 주지 않는 것인가?  



처음은 그저 나의 감정이 왜 이렇게 우울할까? 정도였다. 


아마 그때 누군가 명확하게 그것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더라도 나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 나는 이제 중학교에 입학해서 사춘기라는 문 앞에서 드릉드릉 하며 어디로 갈지 모르는 비비탄 같은 애였고 진심으로 집중력은 한없이 떨어졌으며 심지어 엄청나게 잠도 많았다. 생각하는게 싫어서 수학 점수가 한 자리수를 넘은 적이 거의 없었지만 그걸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던 애였다. 그런 애가 남이 설명한 것에 대해서 귀 기울여 듣고 깊이 공감할 리가 없다. 아마 그냥 귓등으로도 안 듣고 흘려버렸겠지. 반항심도 체력과 관심이 있어야 나온다. 무기력의 끝을 달리고 있던 내 14년차 인생에서 그런 건 사치였다. 정말 말 그대로 흘러버렸을 그 이야기가 지금에 와서 왜 궁금한지 물어보면 글쎄, 그냥 궁금한 걸 어떡해. 내가 앞으로 이 나라를 가득 매울 우울증 환자들의 길잡이가 되겠어! 라는 어마어마한 목표를 가지고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난치듯 일기나 끄적거리고 있을 것도 아니지만 시간이 많이 흘렀고 이제 쓴맛, 단맛, 똥맛 다 보고 인생이 이딴 거구나 하고 찔끔 이야기 할 정도는 되니 진지하게 생각 한번 해 볼라고 하는 것이다. 왜? 나는 궁금하니까.  


그때부터 은둔자 기질이 있었는지 나는 컴퓨터와 꽤 친했고 당시 인터넷이 세상에 나와 검색엔진이라는게 처음 나왔을때였다. 뭘 입력 하기만 하면 가지고 있는 데이터 안에서 적절한 내용들을 검색해 준다는건 어찌나 편한 일인지 모른다. 지금은 당연하겠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손수 찾아 보라고 공중전화엔 전화번호부라는 엄청난 두께의 데이터가 매달려 있던 때니까 얼마나 편했을까. 지금은 공중전화기도 잘 찾아 볼 수 없기로서니 음성으로 검색하는 시대라 그저 웃긴 라뗴 이야기 같겠지만 인생의 벼랑 끝이라도 서 있었던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이었다. 뭘 물어볼 사람이 있어야지.  


학교 컴퓨터실에서 별 걸 다 검색 했던거 같다. 아마 지금의 선생님들의 그 당시 내 검색 기록을 본다면 기겁했겠지. 우울증, 우울한 기분, 기운없음, 자살, 자해 등등등 그 작은 머리통에서 생각할 수 있는 단어들을 이것저것 조합해 알아야 할 것들과 몰라도 될 것들에 대한 필터링을 전혀 거치지 않은 채 나는 이놈의 우울증이라는 정체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화면 안의 세상에는 나보다 덜하고 더한 우울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순수한 도움의 요청과 알고자 하는 욕구를 그리 좋은 시선으로 보지도 않았다. 첫 자해 상처를 들킨 날 너가 뭐가 모자라서 우울증 같은거에 걸리냐 라고 했던 우리 모친의 첫 마디가 생각난다. 그렇다고 뭐 집안 환경이 썩 좋았냐, 그럼 그것도 아니다. 이건 내 얼굴에 침 뱉기 같으니 나중에 이야기 해 보도록 하고 아무튼 딱히 어디가 아픈 사람을 보는 딱한 시선은 아니였다는 거다. 세상 사람들은 그저 나를 인생의 풍파가 오지도 않았는데 엄살이나 부리고 있는 연약한 중생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 이건 아닌데.  



이게 잘못된건가?  



어린 나는 스스로 자책하기 바빴다. 반대로 그 상태에 점점 취해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 경험치가 충분히 쌓이고 나서 생각해 보니 아마 그때 나 같이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면 뭔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거다. 적어도 주변에서 넌 그냥 뇌가 아픈거니까 세상에서 고립되지 말고 치료 잘 받고 약도 잘 챙겨 먹고 의사 선생님이랑 싸우지 말고 제 시간에 꼬박꼬박 자라고 조언하는 언니 한명쯤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굳이 이어가고 싶어하지 않았던 삶을 그럭저럭 이어가면서 세상엔 참 많은 기준들이 생겨났다.   


내가 늘 생각하고 있던 것들도 금지 키워드, 혹은 요주의 키워드가 되어버렸고 그것들 필터링을 거치고 매스컴과 콘텐츠를 통해 아주 두리뭉실하게 가려운 곳을 피해 근처만 긁어주는 정보들이 되었다. 내가 그랬다. 어느정도 검색의 세월을 보내고 나니 나와 공감할수 있고 나와 같은 사람들은 무척 많은데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전부 내가 이거다!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싸가지 없게도 나는 그 우울한 감정을 공유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도 그렇다고 생각이 드는게 모든 사람들의 우울증은 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공감을 해 줘도 속시원하게 공감을 해 줄수가 없다는 결론이 내 생각이다. 덕분에 왠지 오기가 좀 생겼다. 나는 내 글을 찾아서 읽는 사람의 가려운 곳을 완전히 시원하게 긁어주진 못하지만 적어도 가려움에서 몇 시간은 해방시켜줄 글을 써볼 생각을 한거다. 그것을 생각하니 처음 드는 키워드는 상실 이었다.   



사람의 삶에서는 무언가 얻고 잃는 기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 



속된 말로 이제 누군가를 만나기 보단 잃을 것만 남았다는 이야기와 앞으로의 만남을 기대하라는 이야기는 아이러니 하게도 그걸 듣는 당사자의 나이와 꽤 깊은 관련이 있다. 이제 유치원 졸업하고 초등학교 들어가는 애 한테 이제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할 일만 남았다고 하진 않지 않는가. 내가 100살까지 산다고 가정했을 때 (생각해 보니 좀 끔찍하고 힘겨울 것 같은 느낌이다) 어스름하게 반올림에 반올림 쯤 해서 반쯤 살아온 거 같으니까 이제 상실의 전과 후에 대해서 생각해 볼 만 하다고 자체적으로 판단했다. 내가 쓰는건 내 자유니까. 우습게도 이건 진료 대기를 하고 있다가 커피를 마시면서 번뜩 하고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고심해서 나온 논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애초에 난 그럴 인간이 못된다. 검은 개는 나와 같이 있었고 안정기이긴 하지만 언제 다시 그 바닥을 치러 미사일 마냥 떨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걸로 도망치던 글쓰기의 시작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확실히 들었다. 솔직히 날이 갈수록 희미해 지는 내 기억력에 대해 어느정도 치료 목적도 있다.    


왜 시작부터 상실이냐고? 



잃는다는 것에 대해서 겁을 내는 사람들은 꽤 많고 정작 잃고 싶어 하는 것은 그대로 들러 붙어서 아침을 맞이하는 어느 엉망 진창 날의 나와 같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머릿속에서는 정리가 도저히 안되니까 나는 내 재주와 한글을 알고 있는 내 지적 수준을 믿어보기로 했다. 기왕이면 같이 보는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었으면 좋겠다. 좀 더 나아가 무언가 해 볼 용기가 생기면 더 좋고. 아무리 하라고 부추겨도 안하게 되던 나도 이 궁금증 하나에 이렇게 끄적이고 있지 않는가. 


오늘도 고요하고 복잡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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