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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실 Sep 03. 2023

나의 나쁜 검색어

당신의 주변인의 손목을 본 적이 있나요?


미리 말해두겠다. 이 글은 자해에 대한 생각을 적은 글이다. 

유해 키워드 중 하나로 분류가 되어 있는 자해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올 예정이다. 

혹시나 이 단어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있다면 이 글을 읽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IT, 특히 인터넷상에서 서비스를 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며 밥벌이를 한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직업이 이렇다 보니" 라는 말은 좀 순서가 맞지 않은 것 같지만 하여튼 나는 인터넷, 웹 상을 돌아다니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그때그때 흥미가 돋는 검색어를 넣어 결과를 확인하는 것을 즐긴다. 온종일 미친 듯이 그 짓만 하는 건 아니지만 뭔가 궁금하면 검색을 해 보는 작은 취미 아닌 취미가 있다. 요즘 세대들은 유튜브에서 많이 찾아본다는데 아직 나는 초록 창이나 알록이 달록이 창이 더 익숙하다. 아마도 미디어보단 텍스트가 익숙해서 그런 게 아닐까?



이처럼 검색어라는 개념이 있다. 무언가 궁금해서 그것을 찾아보는 데는 검색어라는 것이 꼭 필요하다. 나는 한 수 더 나가서 “나쁜 검색어”라는 말에 흥미가 있다. 그 나쁜 검색어 중에는 국가에서 검색하지 말라고 아예 결과를 필터링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사람 더 궁금해지게 말이다. 어찌 되었든 내가 가는 길을 막아서는 느낌이 되어서 나는 그 검색어의 결과를 어쨌든 보고 만다. 우회하든 브라우저를 다른걸 쓰든 어쨌든 말이다. 왠지 사람들은 접근하지 않는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정보가 도움이 되든 안 되든 나는 그걸 알아 가고 기억해 가는 것이니까 술자리에서 안주 삼아 이야기할 만한 정도의 쓸모는 있는 편이다. 그중에는 내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꾸준하게 검색을 해 오는 단어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상위 랭크 되어있는 검색어 하나다. 바로 “자해”라는 검색어다.



self harm, scar 등으로 검색되는 끔찍한 상처들과 흉터들,
나는 이상하게도 그것들에 평온함과 안정감을 느낀다.



왜 자해라는 말만 입력하면 (뭐 자살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이지만) 그것에 대한 정보 대신 먼저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을 먼저 꺼내는 건지 아직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이 정책을 도대체 누가 만들어 내고 누가 컨펌 내렸는지 모르겠지만,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이미 칼을 들거나, 약을 들거나 뭐 암튼 자신은 해하려고 하는 것을 든 그 사람들은 자신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잊고 있는 게 아니다. 그래, 세상에 태어난 이상 나는 소중한 존재지. 나의 부모님에게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이지.(이건 요즘 세상에 아닌 경우도 좀 많이 보긴 했다.) 그 당사자의 머리가 그것을 몰라서 자해를 컴펌 내서 신경에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다 알고 있다. 정말 그 사람이 머리에 확인하는 들어찬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럼 왜 사람들은 자해하는 것인가?



굳이 칼을 들고 피를 내는 자해만 자해일까? 절대 아니다. 자해는 꽤 다채로운 방법이 있어 자신을 스스로 자해하는 줄 모르고 사는 경우도 꽤 있는 걸로 안다.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도 내가 좋으자고 하는 거지만 결국 나에게 자해라는 것을 하는 사람들은 알아야 할 텐데 말이다. 폭식도 자해고  올바르지 못한 방법도 자해다. 심지어 무언가 하다가 내가 왜 이렇게 멍청하지 하는 것도 정서적 자해다. 이렇게 보니 세상에는 자해하는 방법이 수두룩하다! 


그럼 왜 굳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은
칼을 들고 손목을 긋는 나 같은 사람들일까?
아마 자살로 가는 직전의 단계가 자해라서?



예전에, 아니 지금도 그럴지 모르겠는데 패션 자해 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정신적으로 힘들거나 고통 덕분에 견딜 수 없어 다른 고통으로 그것을 잊어 보려고 자해를 하는 합당한(??) 이유가 있지 않고 그저 보여주기 식으로 자해하는 경우 말이다. 자신만의 멋을 내는 방법을 얼마나 많은데 그런 걸로 멋을 낼까 싶었지만, 멀쩡히 붙어있는 살을 칼로 억지로 갈라내는 아픔을 느끼며 굳이 그렇게 한다는 사실에 혹시 패션 자해라고 해도 아픔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관심도 받았으면 좋겠다는 암묵적 의도가 내면 깊이 숨어 있지 않을까.



그럼 관심받으려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습관적으로 자해하고 살았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나는 관심을 받으려고 내 손목과 팔뚝에 칼을 가져다 대진 않았었다. 오히려 버스 손잡이를 잡고 있으면 드러나는 그 광경에 날 힐끔거리는 시선이 불편했다. 비교하자면 그냥 여드름이 농익어서 볼록하게 올라 왔을 때 그것이 곪고 흉지지 않기 위해서 그 익은 부분을 소독된 바늘로 따고 내용물을 짜내는 것과 비슷하다. 정말 죽지 않기 위해서 자해를 하는 경우였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진짜 죽을 거 같으니까. 견디기 힘드니까. 개복수술하고 마취가 풀린 것 같이 불편하고 아프니까. 그리고 일단 죽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말버릇처럼 안되면 죽어야지 하는 경우가 있는데 죽는 건 생각보다 귀찮고 어렵다. 실패할 확률도 높고 스스로 죽기 위해선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하다못해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지려고 한다고 해도 옥상 문이 잠겨 있지 않은 아파트를 조사해야 한다. 게다가 엔간한 높이에서 떨어지면 못 죽어서 장애등급을 판정받거나 남은 목숨을 누워서 보내야 하는 그런 끔찍한 현생들이 기다리고 있다. 죽을지 안 죽을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죽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내 경험은 그랬다. 
죽기 직전의 사람은 살리고 보는게 인간의 본능 같은 걸까?
우연히 맞닥뜨린 날 살려준 그 피자배달원은 그랬다.



자해를 하는 사람들의 그 너머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쁜 검색어를 가리고, 연결이 잘 안되고 연결되더라도 불친절 해서 자살을 부추기는 그런 자살예방센터 그런거 말고 진짜 그 너머. 개인적 소망으로 왜 자해를 해? 부터 시작 하는 게 아니라 정신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이 신경정신과에 가는 것부터 좀 싸게 해줘라. 찾아가는 서비스 같은 것도 있었으면 좋겠다. 정신병자에게 약을 먹는 건 무척 중요하니까 약은 꼬박꼬박 먹고 있는지 요즘은 어딘가 좋지 않은 게 있는지 물어봐 주는 정신건강 전문직종의 공무원들도 늘어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을 낙오자 취급하는 제발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각성을 좀 했으면 좋겠다. 당신의 행동 하나로 그 사람은 자기를 비하하며 집으로 돌아가 매일 밤, 술을 마시며 칼을 들고 있을 수도 있다고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좀 무리겠지만, 세상 사람들이 전부 친절하고 정직했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위해 자신이 아버지라고 나선다는 식 선의의 거짓말은 뭐 나도 찬성한다)



이렇게 보니 정말, 관심이 필요한데 어쩌면 관심이 필요 없을 수도 있겠다.
알고 보면 그저 주변에 사는 평범한 사람일 수 있으니까.



나는 자해를 하던 시절에 누군가가 나를 안아줬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다. 파란 물빛 아래에 가지런하게 펼쳐진 하얀 모래처럼, 봄날의 귀한 햇볕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론 스킨쉽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 가라앉은 밤에는 누군가 다정하게 안아 주기를 바랐다. 괜찮으냐고 물어봐 주는 것도 고맙지만, 기왕이면 할 말이 없는 나를 위해 가만히 옆에서 온기를 나눠 주길 바랐다. 주변에 누군가가 손목을 가리고 피한다면 김밥을 즐겨 먹던 사람에게 다정한 잔소리쟁이가 그랬듯, 당신이 봄날의 햇살이 되어주는 것은 어떨까?



내 왼팔의 무수히 많은 상처는 어릴 적 채우지 못해 어른이 되고서야 스스로 채우려고 하는 내 욕구가 선택한 예쁜 놀이동산 이미지로 덮어져 있다. 나쁜 검색어를 가리듯 그 시절의 상처는 좋아하는 것으로 가렸다. 다들 아픈 걸 이겨내라고 하는데 그 전에 상처를 주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아프다면 그 아픈 건 이겨내 지지 않는다. 아픔은 변하는 게 아니라 방관하는 거다. 그러니 아픈 건 훨씬 더 좋아하는 것으로 가리면 된다. 가려진 그 안에서 아픈 걸 보듬어 주고 사랑해 주면서 그것을 마음속에서 잘 정리하면 된다. 어차피 잊히지 않는 것이니 잘 정리해서 상자에 잘 넣어서 한구석에 놓아두면 된다. 그게 잊으려고, 이겨 내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훨씬 덜 힘들다.   



그러니까, 해결 안되니까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들고 있는 그 커터칼은 내려놓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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