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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Sep 13. 2022

그 여자가 현실을 견디는 법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겠지”

 

좋은날, 좋은 날, 그 놈의 좋은날! 엄마는 버릇처럼 늘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싫었다. 넌더리가 났다. 아빠가 사업을 시작하고 망하고 시작하고 망하는 일련의 과정을 3번이나 반복하는 동안 몇 십 년째 같은 말을 하는 엄마가 짜증났고,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이 정도 겪었으면 알만도 하지 않느냐며. 아빠가 사업을 하는 이상 우리 팔자는 좋아질 수가 없다고. 빚에, 가난에, 대출에, 누군가한테 돈을 빌리고 갚고, 또 빌리고 못 갚는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라고.

 

그녀의 대책 없는 낙관이 싫었다. 무한긍정과 따윈 개한테나 줘버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거짓희망을 쥐어 짜내 현실을 그런 식으로 외면하면 뭐가 나아지냐고, 자꾸만 못된 말을 쏘아 붙이고 싶었다.


그랬던 내가 어제는 그녀와 같은 말을 입에서 내뱉었다. 정확히는 2022년 9월,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게 없다는 생각이 절실히 든 어느 가을날의 일이다. 근황을 말하자면 이렇다. 작년에 출간한 책의 3쇄 소식(다행히 2쇄까지는 찍어서 현재 3000부 정도 판매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은 목을 빼고 기다려도 들려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브런치에는 아무리 글을 올려도 좀처럼 구독자수와 ‘좋아요’가 늘지 않는다. 글을 써도 메인에 걸리는 일이 없고, 반응도 시큰둥하다. 영 시원찮고 기가 절로 빠지는 나날이다.


이 상태가 근 3개월간 유지되고 있다. 당연히 글을 쓸 동력도 의지도 사라진지 오래다. 써봤자 뭐, 나한테 좋은 일이 일어날 리가 있겠니. 그래서 요즘은 브런치 앱만 종일 켰다 끄는 짓을 반복하고 있다. 누군가 하나라도 ‘좋아요’를 눌러주었을까 싶어 기대를 걸고 앱에 들어갔다가, 다시 실망감만 안고 나와 버리는 것이다.

  

글이 안 풀리는 것 말고 또 뭐가 있을까. 뭐가 있느냐면, 현재 준비하고 있던 것을 잠시 내려놓고 아버지 사업을 도와주게 되었다. 아빠 사업이 몹시 어려워져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데, 직원들이 하나둘씩 떠나가고 이제 마지막 남은 경리분 조차 그만둬버려 내가 그 일을 대신해야 하는 상황이다. 거기까진 괜찮다. 참을 수 있다. 아빠가 원망스럽지만, 나는 여전히 아빠를 사랑하므로 그를 도울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다.


그런데 문제는 일이 더럽게 어렵다는 것이다. BL, PO, PL, CLC, CO, 수출면장 등 무역 용어도 더럽게 어렵고, 세금계산서, 거래명세서, 4대 보험, 외화업무, 수출수입 매출매입 관련 업무도 절차와 관리가 무척 까다로웠다. 인수인계를 받고 있지만, 반은 알아듣고 반은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린다. 게다가 문서와 메일이 죄다 영어로 작성되고 거레되니 미칠 노릇이다. 종이에서 한글이 보고 싶다. 한글의 냄새를 맡고 싶다.



그리고 바야흐로 어제. 낡고 지저분한 회사 화장실 문을 열면서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괜찮아, 나에게도 좋은 날이 올 거야. 머지않아 올 거야 꼭. 변기 물을 내리면서도, 낡은 개수대 위의 담배꽁초를 보며 손을 씻으면서도 계속 중얼거렸다. 멈추지 않고 중얼거렸다. 괜찮아. 좋은 날이 올 거야. 좋은 날이 오겠지. 곧. 나한테도.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엄마가 버릇처럼 입에 달고 다니던 그 문장은, 대책 없는 낙관의 말이 아니라 현실을 견디는 믿음이자 주문의 언어였음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이러다 보면 곧 좋은 날이 올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엄마는 이 현실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시궁창 같은 나날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좋은 날이 올 거라고, 그렇게 믿지 않으면 그녀는 진즉 무너졌을 것이다. 이 비탈길이 계속된다고, 영원하다고 생각했으면 그녀는 결코 지금처럼 웃으며 살지 못했으리라. 나는 그제야 그녀가 거짓희망에 사로잡혀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문의 언어를 곱씹음으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견뎌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 자신에게도, 누군가에게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녀가 그토록 믿었던 말을, 붙잡으며 살았던 말을, 웃으며 말했던 말을 이제는 내가 말해내고 싶다. 이번 글 역시 잘 풀리지 않아도, 아빠 사업이 자꾸만 힘들어져가도, 업무가 너무 어려워 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내가 원하던 일을 하지 못하게 됐다고 해도.


이제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괜찮아. 곧 다시 좋은 날이 올 거야. 머지않아 오겠지 뭐. 그러니까 지금 이래도 괜찮아.” 그래, 괜찮을 것이다. 머지않아 좋은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나도, 엄마도, 그렇게 믿으며 있는 힘껏 현실을 끌어안은 채 씩씩하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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