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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넌 Jun 28. 2024

첨벙 (2024)

감정의 물성

 첨벙 (2024)


 감정의 물성이라.


 민주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중얼거리면서 빈 담뱃갑을 한 번 흔들어 본다. 음. 있을 리가 없지. 4시쯤 태우고 온 담배가 마지막이었던 걸 민주는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혹시? 하는 마음으로 괜스레 한 번 흔들어 본 것이다. 아, 담배 사러 가기 귀찮은데. 시계를 한 번 힐끗 보니 아직 여섯 시 밖에 안 되었다. 자기 전까지 적어도 두세 번은 담배를 피우러 나가게 될 것이다. 이 참에 끊어 볼까. 그냥 참으면 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음. 자기 전까지 적어도 두세 번은 담배를 피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것이고, 그렇다면 적어도 두세 번 이상 그 충동을 이겨 내야 한다는 뜻이다. 내일 아침에 일어났는데 담배가 너무 피고 싶으면? 아침부터 편의점에 쫓아가는 게 지금 가는 것보다 더 귀찮은 일이다. 민주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대문을 열고 나오니 축축한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4시에 나왔을 때는 아직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민주는 비를 맞으면서 담배를 폈다. 어느새 비는 그쳤고, 바닥만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민주는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편의점으로 향했다. 여름의 여섯 시는 꽤나 밝았다. 밝으면서도 볕은 나지 않아 축축한 하늘. 지난밤에 술을 꽤나 마셔서인지 아직 머리 한쪽이 무거운 느낌이었다. 하루종일 축축했던 땅 위로 민주의 슬리퍼가 질질 끌린다. 민주의 슬리퍼를 따라서 물방울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다시 슬리퍼에 따라붙는다.


 감정의 물성.


 민주는 손에서 카드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또 중얼거렸다. 좁은 골목을 지나가면서 축축하게 젖은 길을 스윽 훑는다. 감정의 물성이라. 무슨 감정을 쓴담. 내가 잘 아는 감정이라면 또 꼭 우울 같은 것이나 공허 같은 것을 쓸 것이다. 민주는 왠지 이번엔 그런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맨날 쓰는 거니까. 그럼 다른 건 어떨까. 기쁨, 즐거움, 행복, 그런 단어들을 눈앞에 떠올린다. 눈으로 이리저리 그것들을 훑고 있을 때 민주의 슬리퍼가 작은 물웅덩이에 빠졌다. 첨벙 소리를 뿌리면서 물방울이 튄다. 슬리퍼의 틈으로 축축하면서 뜨거운 물이 들어온다. 민주는 물웅덩이에 발이 빠진 채로 잠시 멈춰 섰다.


 그곳은 마치 물속과 같다. 민주는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늘 그것과 물을 엮어서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물을 더 무서워하는지도 모른다. 겁을 먹고 팔을 휘적거리면 휘적거릴수록 더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것은 억수같이 쏟아지던 빗줄기가 멈추고 남은 물웅덩이 같은 것에서 시작된다. 멍하니 걷다가 무심결에 밟은 그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무심결의 발걸음 하나로 파도가 생겨나 멀어졌다가, 골목 끝의 건물 벽을 한 번 치고 다시 민주에게 되돌아온다. 더 큰 파도, 더 많은 파도가 되어서. 민주는 물을 무서워한다. 어려서 몇 번인가 빠진 후로 더더욱 무서워했다. 그런 민주가 파도에 맞설 용기는 없는 것이다. 곧바로 파도에 쓸려 간다. 어어. 휩쓸린다. 발 하나가 겨우 빠지던 물웅덩이는 민주의 발버둥에 패여서 점점 깊어진다. 민주야. 그냥 다른 발을 내디뎌 봐, 그럼 돼. 민, 주야, 그냥, 다른 발, 딛, 그럼 돼. 민주의 몸이 파도를 따라 수면 위로, 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안 누군가의 목소리가 제 모습을 잃는다. 어떤 목소리도 민주에게 제대로 닿지 못한다. 발에 닿는 것이 없다. 아무리 팔을 휘둘러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민주야! 침착해! 민, 야! 착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역시 제대로 닿지 않는다. 물이 코를 따라, 입을 따라 억수같이 쏟아져 들어온다. 민주는 물과 함께 겁을 집어삼켰다. 살고 싶어, 살려줘, 민주의 목소리가 나오는 대신 그 입 안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는다. 살,ㄹ,ㅈ,세요! 발이, 발이 안 닿아. 무서워. 무서워요. 민주의 머리가 수면 가까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안 파도가 몇 번이나 그 얼굴 위를 덮쳤다. 파도라도 잡을 기세로 손을 흔드는 민주지만, 물 같은 건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다. 파도라도 마찬가지다. 민주는 윽, 윽, 하면서 목구멍으로 들어오는 물을 마신다. 물은 멈출 기세 없이 민주의 뱃속으로 모여든다. 한 방울의 물이 방울방울을 끌어당겨 뱃속을 가득 채운다. 민주는 이제 물이 된다. 민주의 눈도, 민주의 입도, 팔다리도, 손가락이나 발가락 따위 마저도. 휘적거리는 팔이 사라지니 수면이 다시 고요해졌다. 억수같이 쏟아지던 빗줄기가 멈추고 남은 물웅덩이 같은 것이 된다. 그 물웅덩이에 민주는 발이 빠진 채로 잠시 멈춰서있었다.


 따릉,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민주는 눈을 끔뻑였다.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자전거 한 대를 끌고 사람이 서있었다. 민주는 골목의 왼쪽으로 살짝 비켜섰다. 축축하게 젖은 발이 물웅덩이에서 빠져나왔다. 아저씨는 우두커니 서 있는 민주를 한 번 위아래로 훑은 뒤 다시 페달을 밟아 오른쪽 길을 따라 멀어졌다. 민주는 자전거의 뒷바퀴가 물을 튀기면서 멀어지는 것을 멍청하게 서서 바라보다가 왼쪽 길을 따라 나갔다.


 감정의 물성. 뭐 쓰지.


 민주는 오른쪽 발이 축축한 채로 집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운다. 다시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언젠가 민주가 잠깐 떠올린 단어들이 그 희미한 비를 따라서 쓸려 내려간다. 민주가 모르는 사이에 물웅덩이로 모여든 단어들은 민주가 모르는 사이에 파도에 휩쓸려서 저 멀리 골목 끝으로 떠내려갔다가 오른쪽 모퉁이를 따라서 멀어진다. 민주는 괜히 오른발을 한 번 바닥에 툭툭 찼다. 민주의 머리 위로 비가 부슬부슬 떨어진다. 젖은 오른발을 툭툭 차는 동안, 민주의 머리칼이 슬슬 젖어든다.


 감정의 물성.


 민주는 현관 앞에서 발을 수건으로 닦아내며 또 중얼거렸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분명 나가는 길에 뭔가 떠올렸던 것 같은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옅은 담배냄새가 민주의 젖은 머리끝에 스민다. 민주는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벌렁 침대에 드러누웠다.


 밤사이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축축한 공기 사이로 비냄새가 떠다닌다. 검은 자전거를 탄 남자 하나가 빠르게 골목길을 빠져나가면서 물웅덩이를 첨벙첨벙 밟고 지나갔다. 거칠게 튀어나갔던 물방울들이 다시 움푹한 어느 한 곳에 모인다. 민주는 여전히 감정의 물성, 감정의 물성, 하면서 골목길의 왼쪽 모퉁이를 따라 빠져나와 큰길로 나왔다. 축축한 공기가 기분 나쁘다. 비가 오는 날은 참 싫다. 언제 물웅덩이를 밟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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