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소음
그날, 소리는 그렇게 떠났다. 소리는 그날 유난히 차분하고, 유난히 말이 없고, 유난히 조용했다. 유난히, 유난히, 유난스러운 날이었다. 오늘 왜 이렇게 조용해?라는 내 말에 소리는 조용히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하며 씨익 웃을 뿐이었다.
소리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유난히 말이 많고, 유난히 소란스럽고, 유난히, 유난히, 유난히. 음, 유난히 유난스러운 사람이었다. 소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크고, 높고, 빠르게 그 큰 테이블의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었고 나는 구석 자리에서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며 들뜬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소리를 신기하게 봤다. 어떻게 저렇게 말이 많을까. 어디서 저런 말들이 튀어나오는 걸까. 어떻게 저렇게 붙임성 좋게 말을 붙일 수 있는 걸까.
넌 어떻게 생각해?
또 혼자 맥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을 때, 대뜸 나를 휙 돌아보면서 소리가 물었다. 놀라서 맥주를 꿀꺽 삼키고는 입을 꾹 다문 채 소리를 쳐다봤다. 소리는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하더니 씨익 웃어 보였다.
생각나면 말해 줘.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때 시끄러운 소리를 보느라고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말했듯이, 어떻게 저렇게 말이 많을까, 어떻게 저런 말들이, 하면서 소리를 신기하게 보기 바빴기 때문이다. 소리는 눈가를 한 번 찡긋하더니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섞여 들어갔다. 그날 내내 다시 내 차례가 오진 않았다.
소리는 그 뒤로도 가만히 있는 내게 툭툭 말을 붙이곤 했다. 어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부끄러워하거나 쑥스러워하는 일도 없이, 폭포가 쏟아지듯이 내게 이런저런 걸 묻곤 했다. 그런 때에 나는 유달리 부끄러워하고, 유달리 쑥스러워했다. 소리가 내 대답을 기다리면서 내 눈을 바라볼 때면, 말을 하다가 입으로 심장이 먼저 튀어나갈까 봐 내내 노심초사였다. 얼굴이 달아오를 쯤이면 소리는 큰 소리로 웃곤 했다. 그럼 나는 웃는 소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따라서 웃곤 했다.
나 좋아하지?
사람들 틈에 섞여서 또 혼자 맥주를 홀짝이고 있을 때, 그날따라 더 유난스럽게 시끄럽던 소리가 잠시 멀뚱히 나를 쳐다보더니 입을 우물거리면서 소리 없이 모양으로 말했다. 놀라서 맥주를 꿀꺽 삼키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소리를 쳐다봤다. 소리는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홀린 듯이 나도 소리를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는 사랑도 크고, 빠르고, 높이 던졌다. 나는 언제나 조용하고 차분하게 그 사랑을 받았다. 소리는 여전히 부끄러워하거나 쑥쓰럼없이 사랑을 말했다. 사랑해, 사랑해, 하면서 내 팔에 달라붙었다. 그럼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소리의 손을 잡았다. 그럼 소리는 내 손을 잡은 채 길거리를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소리는 어디서나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식당이나 카페 같은 데에 함께 있는 때면 나는 자주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목소리를 낮추라는 시늉을 하곤 했다. 조용하고 느긋하게 말하는 나와 다르게 소리의 목소리는 빠르고, 높고, 컸다.
쉬이이.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곤 눈짓을 준다. 소리가 너무 커. 그럼 소리는 잠깐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소곤대는 시늉을 한다. 목소리 또 커졌어? 라며 헤헤, 바보처럼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 톤 낮아진 소리에게 만족스러워한다. 하지만 곧 다시 크고, 빠르고, 높아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그렇게 될 때엔 여지없이 쉬이이, 하면서 눈짓을 하곤 했다.
나 사랑해?
쉬이이, 또 눈짓을 받은 소리가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소리의 손을 잡았다. 소리는 다른 손으로 내 손 위를 조용히 덮었다. 그 손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소리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소리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씨익 웃었다.
어느 날, 소리는 그렇게 떠났다. 소리는 그날 유난히 차분하고, 유난히 말이 없고, 유난히 조용했다. 유난히, 유난히, 유난스러운 날이었다. 오늘 왜 이렇게 조용해?라는 내 말에 소리는 조용히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하며 씨익 웃을 뿐이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 소리의 눈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처음 소리를 만났던 그 시끌벅적한 술집의 구석 자리였다. 소리의 눈을 보고 있는 동안, 옆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게 들렸다. 소리의 눈을 가만 보고 있을 때, 스피커에서 유행하는 노래가 쩌렁쩌렁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다 소리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떨어질 때, 옆 테이블에서 술잔을 떨어뜨려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귓속으로 와장창, 날카로운 파편 같은 게 파고드는 것을 느끼면서 인상을 찌푸린 채 소리의 눈물을 보고 있었다. 곧이어 소리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오늘에서야 조용해져서 미안해, 라며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오늘에서야 조용해져서 미안해. 소리가 흘리는 눈물에서는 그런 소리가 났다. 아니면 유리 파편처럼 날카로운 소리였나 싶기도 하다. 소리 대신 남은 그 소리가 귓가에 남아서 귓바퀴를 자꾸 찌르고 있다. 소리 없이 남은 소리들이 마음에 남아서 빙빙 돌면서 내장을 긁고 있다. 이제야 말해보는 건데, 실은 처음 만났던 날, 실은 그때 이미 소리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나와 다른 소리에게, 나와 다르게 자기의 소리를 잘 내는 소리는,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나와 다르게 활달하고 밝은 소리가, 사람들과 섞여서 큰 소리로 웃을 수 있는 소리에게 가까이 가고 싶었다. 이것도 이제야 말해보는 건데, 실은 그날 소리가 나에게 뭘 물었는지 알고 있었다. 넌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난 어떤 사람인 것 같아? 나는 말없이 맥주를 꿀꺽 삼켰었다, 눈만 동그랗게 뜨고. 역시 이제야 말해보는 건데, 내가 소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들킬까 봐 맥주만 삼켰다. 소리가 없어지고 나서야 말해보는 건데, 나는 소리를 많이 사랑했다. 소리 대신 남은 소리들을 머금고 이제야 떠들어 보는 건데, 나도 소리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더 이상 소리 낼 수 없는 소리가 되었지만. 소리에겐 남지 않고 내게 남은 사랑의 소리들이 쨍그랑, 쨍그랑, 쨍그랑 내장을 긁는다. 조용히 내장이 긁히는 소리를 듣는다. 소리 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