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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넌 Nov 22. 2024

다시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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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024)


 그놈은 처음 우리집에 올 때부터 아마 상태가 안 좋았던 것 같아. 인터넷에서 수경재배용으로 판매하고 있는 식물들을 세트로 구매했어. 충동적으로 구매를 했던 만큼,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마음에 드는 녀석들을 장바구니에 넣었고, 결제까지 순식간이었어. 스킨답서스, 테이블야자, 호야, 떡갈고무나무, 몬스테라, 스노우사파이어, 싱고니움, 나한송. 종류에 맞춰서 예쁜 화병도 함께 주문했어. 한 뼘 정도 되는 키에 점점 입구가 좁아지는 모양이라든지, 그것보단 조금 더 키가 크고 일자로 쭉 빠진 모양이나, 높이가 배로 길고 표면이 울퉁불퉁한 넓은 것, 길쭉한 모래시계 모양 같은 것들을 샀어. 투명하거나 초록빛의 유리로 만들어진 것들이었지. 화병이 도착하기 전에 식물들이 먼저 도착해버렸어. 그들은 투명한 봉투 안에 하나씩, 깨끗하게 헹궈져 있는 뿌리가 젖은 휴지로 감싸져 있었어. 사실 식물들을 그렇게 잘 알진 못 해서, 다 펼쳐놓고 보니 뭐가 테이블야자고, 뭐가 싱고니움인지 잘 모르겠더라고. 인터넷에 하나씩 쳐보면서 이놈이 테이블야자, 이놈이 싱고니움이구나, 하는 것도 잠시. 같은 날 오후에 화병이 도착해서 하나씩 옮길 즘에는 다시 이름을 잊어버렸지. 책상 앞과 침대 옆 테이블에 나눠서 올려두고 옆방에 있는 동생을 불러서 자랑을 했어. 이름은 잘 모르겠어, 얘가 아마 테이블야잔가? 동생이 맞다길래 그냥 그런가보다 했어. 파릇파릇한 풀들이 내가 직접 고른 화병에 옮겨져 옹기종기 서있는 걸 보니 기분이 퍽 좋았어. 참 예쁘다고 생각했지.


 그중에서 그놈. 그놈이 3-4일이 지날 즘부터 시들시들해지더라고. 여전히 이름을 모르겠어. 아마도 싱고니움? 아니면 스노우사파이어인 것 같은데. 내가 안 보는 사이에 이파리 한 두개가 시들어서 화병 위로 흐트러져 있더라. 당장 화병을 들고 화장실로 옮겨갔어. 잘은 모르겠지만, 어딘가 아픈 게 틀림없었어. 물을 쏟아 버리고 뿌리채 꺼내어보니 뿌리가 새카맣게 상해있더라고. 내 생각에 아무래도 올 때부터 아팠던 것 같아. 곰팡이 같은 것이 부옇게 올라와 있고, 흐물흐물한 뿌리들, 노랗게 기가 죽은 이파리들. 


 참. 버리면 될텐데. 죽어가는 잎사귀들을 본 게 한두번도 아닌데. 나는 다시 새 물을 받아서 책상 위에 다시 올려놓았어. 다음날 책상 앞에 앉아서 괜히 그 화병들을 물끄러미 바라봤어. 그녀석은 초록빛 화병에 담겨서 뿌리색을 한 번에 보기가 어려웠어. 꺼내어 보면 될 것을, 그건 또 귀찮아서 눈을 게슴츠레 뜨고 초록색 유리 너머를 한참 보다가 다시 책상 위의 할일들로 시선을 옮겨 봐. 에잉. 영 마음이 쓰이네. 집중을 하지 못하고서 손을 뻗어서 유리병을 가슴 앞까지 당겨와. 잎사귀들을 괜히 만져보고, 뿌리가 보이도록 한 번 들어올려봤지. 근데 그 흐물흐물한 뿌리 사이에. 새하얀 뿌리가 자라나 있는 거야. 그걸 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컴컴한 곰팡이. 흐물흐물한 뿌리. 노랗게 기가 죽은 엄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이파리들. 
 컴컴한 허공 위. 디딜 곳을 찾아 허우적대는 다리. 초점을 잃은 눈빛. 


 새로 올라온 새하얀 뿌리. 죽은 이파리 위에 다시 자라난 콩알 만한 줄기.
 허공을 딛고 올라선 허연 발바닥. 발목에 새긴 20180522. 


 그 작던 줄기가 길어지다가 다시 잎이 나고.
 7년이 훌쩍 지난 오늘 쓰는 이런 글.


 나는 내가 참 까맣기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의 나는 참 그렇지도 않아. 흐물흐물 짓이겨진 것들 사이에서 여전히 맑은 하늘을 꿈꾸는 나는 참 어떤 이름 모를 그녀석과 닮았어. 살면서 꿈꾸는 삶에 대한 로망이 있냐고 오늘 누가 묻더라. 나는 말이지. 흐린 하늘들, 떨어지는 빗방울, 뿌연 안개, 짓이겨진 마음 같은 것들, 그리고 그 위에 그것들 덕에 내가 그릴 수 있는 파란 하늘, 맑아진 개울물, 내가 너에게 소근소근 전하는 말랑거리는 말들을 전하는 하루하루를 꿈꾸고 있어. 참 소박하지 않니. 그런데 난 그런 게 참 좋은걸. 그래서 나도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해. 돌아온 길을 또 돌아가면서 전에는 보지 못했던, 보도블럭 틈 사이에 핀 작은 꽃을 보게 되고, 그래서 너에게도 여기 아주 작고 예쁜 꽃도 피었어, 하고 알려줄 수 있는 사람. 죽어가던 풀들 사이에서 이런 생각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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