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 결과
다시 아침 (2024)
다시 아침. 그러고 보면 그 전날에도 해가 졌는데, 눈을 뜨니 다시 아침이 되었고 그게 어제, 그리고 어제 분명히 해가 졌지만 다시 아침이 되었다. 실패한 날의 다음날은 너무나 괴롭다. 특히나 어제처럼 대차게 실패한 날이라면 잠자리에 누울 때부터 아침을 맞이할 것이 두렵게 느껴졌다.
어제는 중요한 크리틱이 있는 날이었다. 석사 과정 수료 이후에 1년 만에 하는 졸업을 앞두고, 얼마전부터 청구전이 시작되었다. 단 일주일 간의 전시, 그 전시를 위해서 나는 몇 달동안 괴로운 밤과 괴로운 아침을 맞아야 했다. 수료 이후 1년 사이에 미술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일을 하면서 청구전과 논문 준비를 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퇴근하고 작업실에 도착하면 벌써 8시였고, 다음날 출근을 생각하면 긴 시간 작업을 하긴 힘들었다. 체력도 마음처럼 따라주질 않아서 작업을 하려고 앉아도 집중이 잘 안되는 날이 많았고, 제대로 뭘 했다기보다 괜히 엉덩이만 붙이고 앉아서 시간만 축내다 집에 돌아오는 날이 태반이었다. 논문 심사도 곧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마음은 늘 조급했다. 그런 날의 잠자리에서는 후회가 가득했다. 오늘 뭐 한 거지? 차라리 집에 와서 푹 쉴걸.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에 불똥이 떨어져 쉬이 잠들기가 힘들었다. 그런 후회를 하면서도, 지옥 같은 아침이 돌아오면 나는 또 같은 후회를 향해 걸어 나갔다. 출근했다가, 8시가 되어 작업실에 도착하고, 멍하니 앉아서 캔버스를 마냥 쳐다보고 있었다. 석사 과정 2년, 그리고 그 후의 1년까지의 마무리가 될 청구전을 생각하면 심장이 벌벌 떨렸다. 잘 해야지, 한 방에 잘 해내야지,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마음 속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고, 나는 그걸 몹시 뜨거워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발이 다 녹아 없어지겠다, 싶을 정도가 되어서야 밤을 새워가면서 그림을 완성했다. 청구전 오픈 전 며칠 밤을 샌 뒤에 정신없이 전시장에 그림을 걸었다. 이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나아보일까, 저렇게 하면 조금 괜찮아 보일까, 싶어서 설치하는 데에 한참 시간을 썼지만 최선의 최선 중 가장 나은 선택으로 보이는 구성으로 걸었는데도 성에 안 찼다. 밤새도록 전시장에 머물렀지만 더 나아질 건 없었다. 그렇게 착잡한 마음과 함께 청구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마지막날, 그러니까 어제, 학교 측에서 초대한 비평가, 타학교 교수, 현직 크레이터 등 대여섯명이 크리틱을 위해 전시장에 왔다. 실은 내가 그들 앞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기억 나는 건 그들의 표정, 눈빛, 자세, 뭐 그런 것들이었고 내가 기억하는 그것들은 지난 밤 지독하게 머릿속 안을 떠돌면서 나를 잠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악몽같은 밤도 끝이 나고 아침이 된 것이다. 왜 아침이 또 되어버린걸까, 잠이 부족해서 온 몸이 쑤셨다. 청구전은 지독하게 말아먹고도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 꼬박 1년이 지났다. 결국 그 해의 나는 졸업을 하지 못 했다. 크리틱 이후에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 나는 결국 논문 심사까지 대차게 말아 먹었다. 내 말 한마디마다 아리송한 표정을 짓던 교수님들,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적들에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심사가 끝나고 나는 울면서 집에 왔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번 해에는 글러 먹었구나. 나와 같은 해에 심사를 본 동기들은 모두 졸업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반 년은 작업에 손을 하나도 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가 실패한 사실에 끝없이 매몰되고 있었다. 특히나 나만 실패했다는 것이 나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그림을 그리는 일 자체에 일종의 거부감을 느끼곤 했다. 나는 안 돼. 나는 안 돼.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어김없이 미술관에 출근해서 데스크를 지키고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관객이 적었고, 그 덕에 조금 한가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막 오후가 되었을 무렵, 내 또래 정도 되어보이는 도슨트 직원 한 명이 박스를 품에 안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뭐예요? 하니 나긋한 목소리로 선생님, 이것 좀 봐주세요, 하면서 박스를 내밀었다. 어리둥절한 채로 박스를 열어보니 종이 묶음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한 묶음을 들며 봐도 돼요? 하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찬찬히 읽어보니, 도슨트 스크립트였다. 읽다 말고 박스 안을 슬쩍 뒤적여 보니 전부 스크립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건 왜요? 하면서 다시 손에 쥔 종이를 슬렁 넘겨봤다. 빼곡하게 적혀 있는 글씨 위에 또 빼곡하게 메모가 이어져 있었다. 이번 전시 공부한건데, 영 마음에 안 들어서요, 선생님 전공하셨다고 들어서, 조금 봐주실 수 있을까 하고요. 나는 다시 진지하게 스크립트를 읽어 봤다. 한참 읽고 있을 때 그 선생님이 옆에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해도 해도 부족한 것 같아요, 같은 말들. 6장에 달하는 스크립트를 한참동안 집중해서 읽다가 마지막장을 넘기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아래에 깔린 종이 다발들을 좀 더 들어 슥슥 넘겨봤다. 어떤 것들에는 완성, 마지막, 등으로 표시가 되어 있는 묶음들이 있기도 했는데, 그나마도 조금씩, 조금씩, 추가되거나 지워지거나 매만져진 흔적들이 곳곳에 보였다.
그리고 그날 왠지 나는 그림이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하고 부랴부랴 작업실에 갔다. 반 년만에 찾은 작업실은 왠지 음침한 기운이 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1년 전, 실패할 적에 그렸던 그림들을 전부 꺼내어 벽면을 따라 펼쳐놨다. 작업실 한가운데 서서 빙 둘러 가며 그 그림들을 보고 있다가 문득 손을 펼쳐봤다. 오후에 읽었던 스크립트가 문득 생각났다. 나는 허공에서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기는 시늉을 해봤다. 6장을 모두 넘기고, 나는 다시 박스 안에 손을 넣어 다음 종이 묶음을 꺼냈다. 다시 종이를 넘긴다. 나는 5장, 혹은 6장이거나 7장 정도 되는 종이 묶음들을 차례로 슥슥 넘겨 봤다. 한참, 그리고 또 한참 종이를 정성 들여 하나씩 넘기다가 마지막장 쯤으로 생각되는 것을 넘기고 나서 한 데 묶어 박스에 다시 담았다. 그리고 박스를 닫았다. 그리고 다시 다른 박스를 열었다. 나는 그 커다란 박스를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그림들을 하나씩 그 박스 안에 담았다. 그리고 박스 위에 종이 테이프를 감고, 굵직한 마커를 하나 가져와서 굵직하게 한 단어를 휘갈겨 적었다. 시작, 나는 감히 시작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시작이라고 적힌 박스 하나를 상상하면서 그 안에서 그림을 하나씩 꺼내와서 그림 위에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아주 새로운 그림이 되고, 어떤 것은 아래의 그림이 비쳐보이기도, 어떤 것은 정말 작은 부분의 변화만을 가진 채 각각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번 청구전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물론 잘 해내고, 잘 끝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 또 불안한 기운이 샘솟는다. 그럴 때 나는 다시 박스 하나를 떠올렸다. 그 안의 종이 한 묶음을 꺼낸다. 마지막이라고 적었다가, 빨간 볼펜으로 지익 지익 그은 뒤에 2번째라고 고쳐 적는다.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다. 무엇이 마지막일지 모르겠다. 물끄러미 눈 앞의 그림을 바라본다. 실패한 그림 위에 덧그린 그림들이 퍽 마음에 든다.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다가 창밖을 보니 컴컴해진 후였다. 문득 밤이 된 것이다. 밤은 다시 아침이 될 것이다. 아침은 다시 밤이 될 것이고. 나는 내일을 위해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집에 가는 길은 길고 지루했지만, 길고 지루한 길을 지나 새로운 아침을 만날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가볍게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