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허락되거나 허락되지 않은

<동그라미 찢기> 4

by 김민주

어떤 것은 너무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데, 때때로 나는 그 존재를 태평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곤 한다. 내가 유난히 껄끄럽게 여기는 것들도 당연한 듯 제각각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꼭 세상에 있고, 있어야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내게 이름 석자가 붙어 이 세상에 있음을 증명하는 기초가 되는 것처럼, 이름이 붙었다는 사실이 그 존재를 증명하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 이름이 등본, 신분증, 하다 못해 어떤 사이트에 가입할 때, 내가 누구인지 밝힐 적에 가장 손쉽게 꺼내보이고 가장 명백하게 나를 가리키는 하나의 정보가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항상 내가 있고, 있어야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있으므로 내 이름이 있다. 그러니 이름을 가진 것들이 이 세상에 있을 터인데, 와중에 나는 태평하지 못해 어떤 것들은 끝없이 의심하게 된다. 나의 이름이 나는 아니고, 오히려 어떤 일말의 가책도 없이 나와 멀어질 수 있는 게 바로 나의 이름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름의 의의는 그 존재와 상관없이 '그것이 존재하길 바라는 기대'나, '존재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을 때에나 힘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하곤 한다. 예를 들면 '사랑'같은 마음의 이름이 그렇다. 그건 사랑의 이름이고, 사랑을 담고 있으면서, 사랑이면서, 너무 쉽게 사랑이 아니기도 하다. 마치 내 이름이 김민주이기 때문에 나는 쉽게 김민주가 되면서, 단지 김민주만으론 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세상의 모양이 태평하지 못한 나에겐 굉장히 잔혹하고 무책임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나는 '실은 그런 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바람과 기대, 희망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이라고 주장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내 이름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에 허투루 의존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 비는 왜 비야?"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다. 어린 나는 말을 배울 적에 비는 '비'라고 익혔고, 흐린 구름 아래로 비가 내릴 적에는 자연스럽게 '비가 내린다'라고 말하고 쓰게 되었다. 그런데 비는 어떻게 '비'가 되었을까. 바람은? 구름은? 해는? 비가 '구름'이 되고, 구름은 '해'가 되고, 해는 '바람'이 되고, 바람은 '비'가 될 순 없을까? 이를테면 바람은 해에 가려지고, 그 해가 짙어져 구름이 내리고 비가 부는 것이다. 나의 이런 장난 어린 호기심 끝에 엄마는 옅고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비니까. 비는 비니까."


라고, 단칼에 비를 '비'로 잘라냈다. 바람은 바람, 해는 해, 구름은 구름, 비는 비, 그냥 그런 것. 내리는 비를 보고 내 멋대로 '구름이 내리고 있다'라고 말하면, 그 비는 더 이상 모두의 비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동그라미는 동그라미. 엄마는 엄마. 나는 나. 엄마, 나는 왜 '나'라고 해? '나'가 나를 뜻하는 말이니까. 비는 비, 나는 나. 비는 비. 그런데 나는.


나는 나? '나'?


엄마, 비는 비라면서. 비는 비니까 비라고 부른다며. 그럼 나는 '나'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나, 나는 나, 나는 나, " 아무리 주문처럼 외쳐보아도 나는 '나'로 단칼에 잘라낼 수가 없다. 엄마에게 비가 '비'인 것은 "비는 비니까 비라고 부르는 일" 정도일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도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원형인 것처럼 단박에 비를 '비'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으로 "그럼 나는 나야?"라고 물으면 같은 식의 대답을 할 것이다. "나는 나, 나는 나니까. 너는 너, 너는 너니까." 그러나.


나는. 동그라미의 딸이다. <동그라미 찢기>를 쓰고 있다. 나는 앞서 '동그라미의 딸'이라고 선언했다. 누군가는 동그라미가 됐다. 내리는 비를 보면서 '구름이 내린다'라고 말해본다. 비는 영원히 '비'일 것이나, 나는 영원한 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쓰고 있는 그 모든 주체가 나이면서 '나'라는 것인데, 여전히 나는 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말하는 '비'가 나에게 '구름'이기 때문일까. 그런 잔혹하고 무책임한, 엄마와 나 사이의 간극이 나를 나일 수 없게 만든다. 이 세상에서 비는 '구름'이 될 수 없고, 나의 엄마와 나의 사랑은 '사랑'이기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동그라미를 찢게 된다.

찢어진 동그라미의 세상에선 비는 영원히 비는 아닐 것이고, 나는 영원히 내가 된다. 그래서 나의 구름이 내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는 그것이 비라는 것을 영영 모르고, 누군가는 나의 구름이 그의 비라는 것을 알아 우산을 챙길 수도 있다. 비는 구름이 되어, 구름은 해가 됐고, 해는 바람이 되었으며, 바람은 비가 된다. 이들은 그 세상을 돌고 돌면서 뜨고, 내리고, 불고, 진다. 그래서 내 이름도 일말의 가책도 없이 나와 멀어지지만 나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와 함께 동그라미를 잇고 있는 모든 점이 흩어진다. 어떤 문자로 상정되는 위치, 어떤 숫자로 설명되는 모양, 무언가를 형용하고 명명하며 존재하는 그 모든 점이 흩어진다. 그들이 이어지면서 생긴 운동과 방향은 상실한다. 그로써 동그라미는 동그라미로, 비는 비로, 사랑은 사랑으로, 나는 나로 살게 된다. 그러니 위치한 자리를 제자리 삼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고, 어떤 자리에 있는 것들은 '자리한다'는 것만으로 늘 자신이 제자리에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영원히 변하여, 한 점으로 대응될 수 없는 것이 살 수 있게 된다. 찢어진 동그라미의 세상에서는 말이다. 그런데, 하지만, 그러나.


"엄마, "


나는 엄마에게 또 다른 존재에 대해 물어보려 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구태여 묻지 않아도, 틀림없이 엄마는 나를 사랑하니까. 그러나 나는 엄마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여긴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이 되지 못하고, 그래서 비는 '구름'이 된다. 그러니 내게 '찢어진 동그라미'란, 영영 '찢어진 동그라미'일 수밖에 없게 된다. 나의 기대와 희망은 찢어진 동그라미를 만들고, 찢어진 동그라미 안에서 살아있을 수 있다. 동시에 그건 실재하지 못하는 허상이 되는데,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비를 '비'라고 부르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름은 너무 잔인하고 무책임하리만큼 그 실재와 멀어서 나는 나일 수 없고, 찢어진 동그라미만 '찢어진 동그라미'가 된다.


그렇게 어떤 이름의 의의는 헛된 상상에 의한 희망이어야만 허투루 나를 버리지 않을 수 있게 해 준다. 불변하는 가짜만이 나를 지키고 있으니 그 얼마나 든든하고도 무용한 모양새인가.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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